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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론 폴, End The Fed(연준을 끝내라) 한글번역 part. 3

wisstark 2014. 8. 21. 22:35

예전에 번역한 거라, libertarian과 liberal이 (사실상 거의 반대되는 의미임에도 불구) 모두 자유주의로 표기되고 있습니다. 혼동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수정한다면 libertarian은 자유지선주의, 또는 리버테리안 쪽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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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My Intellectual Influences
 제 3장. 나의 지적인 영향 
 
 My interest in monetary economics began quite early. Born in 1935, I remember the tail end of the Depression and the shortages of World War In being from a family that taught hard work, frugality, and savings as virtues, I knew early on that even a few pennies were not to be ignored. But then again, a copper penny actually had real value.
 금융 경제학에 대한 나의 관심은 아주 일찍 시작되었다. 1935 년에 태어난 나는 대공황의 끝 부분과 세계 대전 때의 부족을 기억하고 있다.  열심히 일하는 것과 검약과 저금을 미덕으로 가지고 있는 가족으로부터, 나는 일찍이 약간의 페니조차도 무시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또, 1 페니의 구리는 실제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I recall walking with my brothers to a local store to buy candy. We each had four or five pennies and got a small bag full of candy for them. Today, we not only can't afford to make our pennies out of copper, we can't even afford to make them out of zinc. The penny is destined to be made of steel or eliminated as a cost-savings measure. Indeed, the penny is a nuisance for most of us today.
 난 나의 형제와 함께 사탕을 사기 위해 지방의 가게에 갔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들은 각자 4 또는 5 페니를 가지고 있었고 사탕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 작은 가방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우리는 페니를 구리로 만들 여유가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것들을 아연으로 만들 여유도 없다.  페니는 철로 만들어지거나 비용 절약 측면에서 제거될 운명에 있다.  정말로, 페니는 오늘날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성가신 존재일 뿐이다.  
 
 My first job, and that of my brothers, was to assist my dad in a small dairy run out of our basement. Even at the age of five, the incentive system was instilled in me. Our job was to make sure all the glass bottles, which had been hand washed, were clean. It was bad for business if a customer saw a black spot in the bottom of a milk bottle. For each dirty bottle we found as we removed them from the conveyer belt and placed them into a wooden case, we were rewarded a penny. It didn't take long for us to know when a certain uncle was washing the bottles, since more dirty bottles were found on those days.
 나와 내 형제의 첫번째 일은 내 아버지의 낙농장에서의 일을 우리 지하실에서 돕는 것이었다.  겨우 5 살 때였지만, 보상 시스템은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  우리의 직업은 손으로 씻겨진 모든 유리 병이 깨끗한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고객이 우유 병 바닥에서 검은 점을 보거나 하는 것은 비즈니스에 좋지 않았다.  더러운 병이 발견될 때마다 우리는 그것들을 컨베이어 벨트에서 제거하고 목재 케이스로 대체했다.  우리는 페니를 보상으로 받았다. 언제 특정한 아저씨가 병을 씻고 있는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 날에는 더 많은 더러운 병이 발견되었다.  
 
 This experience taught me the importance of working, and the value of a penny. My parents did not believe in allowances, but I was a natural saver, even in my early years. It seems at times that being a saver or a spender is an innate tendency, and early habits are retained throughout life. My early experience of learning the value of a penny served me well when it came time to pay for my education.
 이 경험은 나에게 일하는 것의 중요성과 1페니의 가치를 가르쳤다. 나의 부모는 용돈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어렸을 때부터 타고난 절약가였다. 때때로 절약가나 낭비가가 되는 것은 타고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일찍 생긴 습관은 삶 전체에 적용된다.  1 페니의 가치를 배운 내 어렸을 때의 경험은 내 교육을 위해 돈을 지불해야 했을 때 도움이 되었다.  
 
 My dad had two concerns about the milk itself. First, he tested for quality by tasting each can of milk coming in from any of numerous farmers; he could tell if the cows had gotten into an onion patch, for example, which ruined the milk. The other was a concern that the milk that might have been diluted by water. In time I realized that the crime of dilution was identical to the crime of managing an elastic currency by the dilution principle.
 나의 아버지는 우유 그 자체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첫째로 그는 각각의 농장으로부터 나오는 우유의 품질을 테스트했다. 예를 들어 그는 소가 우유를 망치는 onion patch 를 가진 적이 있다면 그것을 말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은 우유가 물로 희석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관심이었다.  언젠가 나는 희석이 희석 원리를 통해 화폐 유동성을 관리하는 범죄와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My dad was not a coin collector, but he did understand the value of hard work, savings, and even a penny. Somewhere along the way, out of fascination with the switch from the Indian Head penny to the Lincoln Head penny, he started throwing Indian Heads into a coffee can - pennies that I'm sure came from our retail milk sales. At the time, a quart of milk cost 15 cents.
 나의 아버지는 동전 수집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힘들게 일하는 것과 절약과 1 페니의 가치를 이해하고 있었다.  언젠가 인디언 헤드 페니(Indian Head penny)로부터 링컨 헤드 페니(Lincoln Head penny)로 관심이 옮겨갔을 때 그는 인디언 헤드(Indian Head)들을 커피 캔에 집어넣었다.  나는 그 페니가 우유 소매상들로부터 왔다고 확신한다.  그 때에, 1 Quart 의 우유의 가격은 15 센트였다. 
 
 I'm not sure of my exact age, but I probably became interested in coin collecting during World War II. I had access to the coins that came in through milk sales, and early on as a newspaper boy for the Pittsburgh Press. That can of Indian Heads sat on a desk in our kitchen for years. By the 1940s, the Indian Head penny had long since left circulation. There were 986 pennies in the can as I recall. I would scan them and sort them, and I knew exactly which pennies were there.
 정확한 나이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는 2 차 세계 대전 때에 동전 수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우유 판매를 통해서 그리고 일찍이 Pittsburgh Press 의 신문을 판매원으로써  동전을 얻었다.   인디언 헤드들이 들어있는 그 캔은 우리 주방에 몇 년 동안 놓여 있었다.   1940 년대에, 인디언 헤드 페니는 유통이 중지된지 오랜 기간이 지나 있었다.  내 기억에 986페니가 캔에 들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조사하고 분류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정확히 어떤 페니가 거기에 들어 있는지 알고 있었다.   
 
 Although it was obvious that I was the most interested of the five brothers in coin collecting, there was no way that those pennies would become mine because of the fairness doctrine of our parents - "no special favors."
 내가 5 명의 형제들 중에서 동전 수집에 가장 관심이 많았다는 건 명백했지만 "특별 대우는 없다." 라는 우리 가족의 원칙 때문에 내가 그 동전을 가질 방법은 없었다.  
 
 I saved my money, and when I had $20, I negotiated a deal with my dad: $20 for 986 pennies. It was a big transaction for me, but only I knew that buried in that can was a 1909-S in good condition, which even then made the purchase a great deal. I still have that particular penny and most of the other 985.
 나는 돈을 아꼈고 내가 $20 를 가지게 되었을 때 나는 나의 아버지와 협상했다: 986 페니를 위한 $20. 그것은 나에게는 큰 거래였지만, 오직 나만이 그 캔에 1909-S 이 좋은 상태로 숨겨져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심지어 그 구입을 좋은 거래로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 특별한 1페니와 대부분의 다른 985 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Pennies are a nuisance for most of us today. But that special 1909-S has kept up with inflation and more due to its numismatic value. As a young boy, I understood how rarity and quality in a coin gave it value - the fundamentals of numismatics. There were only 309,000 1909-S pennies minted. It was years before I understoo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money supply and the value of our currency and the business cycle, but even back then I was impressed with the relationship of low mintage and value.
 오늘날 페니는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성가신 존재다.  그러나 그 특별한 1909-S 는 그 화폐로써의 가치 때문에 인플레이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동전의 희소성과 품질이 그것에 가치를 주는지 - 화폐학의 근본 - 를 알게 되었다. 주조된 1909-S 페니는 단  309000 개만이 있다. 그것은 내가 돈 공급과 통화 가치의 관계와 경기 변동의 관계를 이해하기 몇 년 전이었다. 그러나 그 전에도 나는 화폐의 낮은 주조와 가치에 대해 감명받았다.  
 
 During World War II, I heard the radio announcements urging us all to buy war bonds. We were encouraged at school to do the same, and I'm sure newspapers encouraged their purchase. It was the patriotic thing to do. I did it; my whole family did it as well. We would save $18.75 to buy a$25 war bond that matured in ten years, earning 2.9 percent interest.
 2 차 세계 대전 동안에, 나는 라디오 발표가 군사 공채를 사도록 우리를 부추기는 것을 들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같은 것을 수행하도록 권해졌다. 나는 신문이 그들의 구입을 촉진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애국적인 행동이었다.  나는 그것을 수행했다.  내 가족도 그것을 잘 수행했다.  우리는 $25 의 군사 공채를 사들이기 위해  몇 년 동안 2.9 % 의 이자를 얻으면서 $18.75 를 아꼈다.  
 
 It was only a stunt, as I found out many years later. Almost all the funding for the war came from taxes and the Fed's inflating of the currency. The Buy Bonds campaign was a psychological tool to keep everyone focused on the war. Wage and price controls and rationing made a bad situation worse, yet it was our duty to march in lockstep with all the mandates and controls.
 내가 몇 년 후 알아본 바로는 그것은 오직 곡예일 뿐이었다.  전쟁을 위한 거의 모든 자금은 세금과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의 통화 팽창으로부터 왔다.  국채 구입 캠페인은 모두가 전쟁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기 위한 캠페인이었다.  임금과 가격에 대한 통제와 배급이 나쁜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었다. 그러나 권한과 통제에 따르는 것이 우리의 의무였다.  
 
 From personal memory and historic records, I know the Depression was not ended by the beginning of the war, as many still claim. War's mass death and property confiscation and destruction are never a benefit to the economy, yet the warning that bad economic times frequently lead to war  - when a country can least afford it - is appropriate for today. War distracts from economic problems, a benefit to bad politicians. Unemployment rates go down when millions are engaged in the war effort, even forced into it. All too often these politically convenient wars are not at all necessary.
 개인적인 기억과 역사적 기록으로부터, 나는 대공황이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듯 전쟁의 시작으로부터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전쟁의 대량의 죽음과 재산에 대한 몰수와 파괴는 경제에 절대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쁜 경제가 - 국가가 그것을 수행할 여유가 있는 한 - 전쟁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경고는 오늘날에 적합하다.  전쟁은 경제 문제를 분산시킴으로써 나쁜 정치가들에게 이익을 준다.  백만이 전쟁에 종사하고 있을 때 실업률은 내려간다.  심지어 그것을 강요당한다.  너무나 자주 정치적으로 편리한 이 전쟁은 전혀 필요한 것이 아니다.  
 
 I recall as an eight- or nine-year-old wondering about all this while collecting coins, buying stamps, putting them in a book, then buying a bond and thinking it was a bit cumbersome. Why didn't they just print what they needed? I sought an answer from my oldest brother. Not realizing that's exactly what they were doing, my brother logically explained to me why that wouldn't work. He simply said, "If they did that, the money wouldn't be worth anything." That may be way over-simplified, yet it was true.
 나는 여덟 살인가 아홉 살 때에 동전을 모르고, 우표를 사고, 그들을 책에 붙이고, 채권을 사는 동안 그것이 약간 귀찮다고 생각한 기억이 난다.  그들은 왜 그냥 그들이 필요하는 것을 인쇄하지 않았는가? 나는 그 대답을 나의 형에게서 받았다. 그게 정확히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라는 걸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도, 내 형은 논리적으로 왜 그것이 통하지 않을지에 대해 내게 설명해 주었다.  그는 간단히 말했다, "그들이 그런 일을 하게 되면, 돈은 더 이상 가치가 없게 될 것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지만, 그래도 그것은 사실이다.  
 
 That short conversation stayed with me over the years as I tried to understand the process of currency inflation and how prices are subjectively established. Although the monetary system may be a crucial factor in itself, it is not the sole deciding factor in setting the prices of goods and services. It's a bit more complicated than that. It was only after the war and after price controls were removed, with a significant increase in the money supply, that more people knew what was going on. Prices escalated sharply between 1945 and 1947, at an annualized rate of 17 percent.
 그 짧은 대화는 내가 통화 팽창의 과정 및 어떻게 가격이 효과적으로 결정되는지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몇 년 동안 내게 머물러 있었다. 통화 제도가 거기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을 결정하는 유일한 요인은 아니다.  그것은 약간 더 복잡하다. 돈 공급의 상당한 증가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되었던 것은 전쟁과 가격 통제가 제거된 후였다.  가격은 17% 의 연율로 1945 년과 1947 년 사이에 급격히 상승하였다.  
 
 I have memories of rationing during World War II. Ration stamps were required for crucial items like gasoline, butter, and meat. When we sold a pound of butter at our house, we had to also collect the ration stamps. These conditions existed along with wage and price controls - hardly a good lesson for young Americans trying to learn what freedom was! Without the designated rationing stamps passed out by the government, these selected goods were not available, unless they were bought in the underground (free) market. Prohibition or rationing was so detrimental that other markets quickly developed out of need.
 나는 2 차 세계 대전 동안 실시된 배급제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할당량 증서는 가솔린이나 버터, 고기와 같은 필수적인 항목을 얻는 데 필요했다.  우리가 1 파운드의 버터를 팔았을 때, 우리는 또한 할당량 증서를 수집해야만 했다.  이 제한이 가격 통제와 함께 존재했다.  그것은 젊은 미국인들에게 무엇이 자유인지에 대한 좋은 수업이 되었다.  지하의 자유 시장을 이용하지 않는 한 정부에 의해 나누어진 지정된 할당량 증서 없이는 그 제한된 상품들은 이용할 수 없었다.  금지 및 배급제가 너무나 유해했기 때문에 다른 시장이 필요에 의해 발달했다.  
 
 I'm sure some believed that rationing scarce resources during the war was absolutely necessary. Others were quite aware that it was part of the war propaganda to keep people focused on the political goal. Those who understood the free market knew that during a crisis or time of shortage, the market is required more than ever.
 나는 어떤 사람들이 전쟁 기간에 희소 자원을 배급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고 생각할 거라고 확신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사람들을 정치적인 목표에 집중하도록 하는 전쟁 선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자유 시장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위기나 부족이 발생하는 시간에 시장이 다른 때보다 더욱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In allocating scarce resources, imposing wage and price controls is the last thing we need government to do. It only exacerbates the problem, as I well remember. We really never learn much from our mistakes. Wage and price controls were used again during the Korean War and in the early 1970s, after the breakdown of the Bretton Woods Agreement, the unstable gold-exchange standard system established in haste after World War II.
 희소 자원의 할당에 있어서 임금과 가격 통제의 도입은 정부가 가장 마지막에만 고려해야 할 일이다.  내 기억에 그것은 단지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실수로부터 결코 많은 것을 배우지 않는다.   임금과 가격의 통제는 한국 전쟁 때와 2 차 세계 대전 이후 세워진 불안정한 금 본위 시스템이었던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한 시기인 1970 년대 초반에 다시 한번 사용되었다.  
 
 I remember my dad as being straitlaced. He believed that we should all follow the rules and obey the government. Yet I do remember being with him on Saturday afternoons when a butcher shop in town had all the meat you wanted, at a price - and without ration stamps. Evidently, it was worth bending the rules a bit to get some meat on the table for his family. There seemed to be no secret about what was going on. Business was brisk, and the event took place across the street from the police station. This was probably my first real-life experience in the free market solving problems generated by government mischief.
 나는 나의 아버지를 엄격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모두 규칙을 따라야 하고 정부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토요일 오후에 그와 함께 있었을 때 마을의 정육점 가계에 원하는 모든 고기가 할당량 증서 없이 적당한 가격으로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분명히, 그의 가족을 위해서는 테이블에 있는 약간의 고기를 얻기 위해 규칙을 조금 어길 가치가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사업은 활발했다.  그리고 이벤트는 경찰서 앞을 가로지르는 거리에서 개최되었다.  이것이 아마 정부의 장난에 의해 생성된 문제를 자유 거래 시장이 해결해 주는 것을 본 나의 첫번째 경험일 것이다.  
 
 Sadly, we haven't learned a whole lot. Even today, as we're struggling to get out of a gigantic economic crisis, the principle of government meddling in pricing goods and services persists. The worse the crisis gets, the more government interferes in the pricing mechanism. Today the black market in labor and goods is huge.
 불행히도, 우리는 그다지 많은 것을 배우지 않았다. 심지어 우리가 거대한 경제 위기 속에서 저항하고 있는 지금조차도 정부가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에 간섭해야 한다는 주장이 횡횡한다.  위기가 심화될수록, 가격 메카니즘에 대한 정부의 간섭은 심해진다.  오늘날 노동과 상품의 암시장은 거대하다. 
 
 Our disastrous tax code has contributed substantially to the need for the underground economy. This need will surely grow as the economy further deteriorates. In economic terms, all this activity is beneficial in the underground, despite politicians' cries that the government is being cheated out of hundreds of billions of dollars in tax revenue. If the market quits functioning, the underground economy will expand exponentially. In some other countries the underground market is responsible for keeping the economy afloat.
 우리의 비참한 세법은 지하 경제에 대한 요구에 상당히 공헌했다.  경제가 한층 더 악화될 때에 이 필요성은 확실히 자랄 것이다.  경제학의 용어로, 수십억 달러의 세금 수입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정치인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활동은 지하 공간에 유익하다.  시장이 작용을 그만두면, 지하 경제는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될 것이다.  다른 어떤 국가에서는 암시장이야말로 경제를 떠받치는 책임이 있다.  
 
 After World War II, economic conditions improved. My grandparents lived nearby and had some land that they were contemplating selling. I recall my dad urging my grandmother to sell the land, but she was hesitant. She was concerned about the money. My grandfather was born in Germany and came to the United States at the age of fourteen and settled in Pittsburgh. My grandmother was born in the United States, but her parents were both immigrants from Germany. In 1926 they sailed to Germany to visit relatives. I'm sure they heard stories about the German inflation of the 1920s, and this influenced her thinking.
 2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 상황은 개선되었다. 나의 조부모는 근처에 살고 있었고 팔기를 고려했던 약간의 땅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나의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땅을 팔기를 권유했지만 그녀가 주저했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돈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독일에서 태어났고 14 살 때 미국에 와서 피츠버그에 정착했다.  나의 할머니는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는 둘 다 독일에서 온 이민자였다. 그들은 친척을 방문하기 위해 1926년에 독일을 향해 항해했다.  나는 그들이 1920 년대의 독일 인플레이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것이 그녀의 생각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I remember the answer my grandmother gave my dad. She thought she should not sell and should hold on to the land "in case the money goes bad." Although the U.S. inflation after World War II was mild compared to the German inflation of 1923, it must have been a concern for her.
 나는 내 할머니가 내 아버지에게 했던 대답을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돈의 가치가 하락할 경우" 땅을 팔지 말고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세계 대전 II 후의 미국 인플레이션은 1923의 독일의 인플레이션과 비교하면 온화했지만, 그것은 그녀에게는 염려의 대상이었다. 
 
 Shortly after the war, wage and price controls were removed and consumer prices advanced sharply, which also must have contributed to her concern. Retail prices were rising as a consequence of the inflation to finance the war
 전쟁이 끝나자 마자, 가격 통제가 사라졌고 소비자 물가는 급격히 올라갔다.  그것 또한 그녀의 염려에 공헌했을 것이다.  소매 가격은 전쟁 때의 금융 인플레이션의 결과로 올라가고 있었다.  
 
 My grandmother was devout and knew the Bible. She had read Genesis 47:15: "So when the money failed in the land of Egypt and in the land of Canaan, all the Egyptians came to Joseph and said, 'Give us bread, for why should we die in your presence? For the money has failed.'"
 나의 할머니는 신앙심 깊고 성경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창세기 47:15 를 읽었다: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돈이 진한지라 애굽 백성이 다 요셉에게 와서 가로되 돈이 진하였사오니 우리에게 식물을 주소서 어찌 주 앞에서 죽으리이까?" 
 
 Our current problem was well established, even in ancient Egypt. Debased currencies fail. Governments cannot manage money.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은 심지어 고대 이집트에서조차 확인된다.  가치가 떨어지는 화폐는 실패한다.  정부는 돈을 관리할 수 없다. 
 
 Although the destruction of the dollar has been slow and insidious, deep concern existed even before President Nixon, in 1971, eliminated what remained of the gold standard. During the Korean War, inflation was a serious enough concern, just as it had been during the 1970s, to disguise it with wage and price controls.
 비록 달러의 파괴는 느리고 잠재적으로 진행되었지만, 닉슨 대통령이 1971 년에 금 본위재의 잔재를 제거하기 전에 이미 깊은 우려가 존재했다. 한국 전쟁 동안에도 인플레이션은 심각한 우려의 대상이었다.  임금과 가격 통제로 그것을 위장한 1970 년에 그랬던 것처럼.  
 
 Today's politicians in Washington, oblivious as usual to the dangers of inflation, show no concern for the dollar or the operations of the Federal Reserve. They are, instead, terrified of deflation. Think of what the word deflation means. Defined as a declining money stock, deflation can actually be economically clarifying. It causes banks to tighten up their lending standards and encourages businesses to run tighter operations. It can put the squeeze on government, as it becomes more costly to service the debt. None of these is a regrettable trend. Another definition of deflation concerns a falling price level. This is another way of saying that your money becomes more valuable over time. That is not something to regret, either. Business can operate and thrive under these conditions: look at the software and computer industries since the 1980s. And if we look back at the last quarter of the nineteenth century, increased purchasing power (deflation) was accompanied by the greatest period of economic growth in world history, with the benefits of capitalism spreading to all sectors of society.
  통상 인플레이션의 위험을 잊는 오늘날의 워싱턴 정치인들은 달러나 연방 준비 제도의 운영에 대해 어떠한 관심도 보여 주지 않는다.  그들은 대신 디플레이션을 두려워한다. 디플레이션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라.  통화 스톡이 줄어드는 것으로 정의하면, 디플레이션은 사실상 경제적으로 명확해질 수 있다.  그것은 은행이 그들의 대금 표준을 단단히 하도록 하고 사업이 더 단단한 경영을 하도록 권한다.  부채를 서비스하는 것이 비용이 많이 들 때 그것은 정부를 압박할 수 있다.  이 중 어느 것도 유감스러운 경향이 아니다. 디플레이션의 또 다른 정의는 가격 수지가 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돈을 아끼는 것이 점점 더 가치있는 일이 된다고 말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그것 역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다. 사업은 여전히 작동할 수 있고 이 조건 아래에서 성공할 수 있다: 1980 년대 이후의 소프트웨어와 컴퓨터 산업을 보라.  그리고 우리가 19 세기의 마지막 분기를 되돌아 보면, 구매력의 증가 (디플레이션) 는 세계 역사에서 가장 큰 경제 성장기를 동반했었으며 자본주의의 이점은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퍼져나갔다.  
 
 So I do not believe deflation is a threat. In fact, we would be lucky to face such a "threat"! The real threat we face is the opposite. The concern my grandmother expressed may have been overblown and early, but we as a nation are setting the stage for "the money going bad," German-style. We may be getting closer to that day than anybody realizes.
 그러므로 나는 디플레이션을 위협으로 보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그런 "위협" 에 직면하는 것이 더 운이 좋을 것이다.  우리가 직면한 진정한 위협은 정반대의 것이다.  내 할머니가 표현한 관심은 너무 이르고 과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가로써의 우리는 독일 스타일로 "돈이 나빠지는" 시기에 접어들고 있다.  우리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그 날에 가까워지고 있다.  
 
 The janitor at our grade school in Green tree, Pennsylania, was an interesting character. He was seen as a bit of an old sage, at least by me. Others who attended that school will remember Willy (William Foley). He was chief cook and bottle washer for the entire building - no assistants. That is, except in the summer months when a few of us got jobs scrubbing walls and windows and painting. We were all of twelve or thirteen years old, and I'm sure child labor laws were never on anyone's mind. Our early wages were surely less than a dollar, since at that time I also worked in a drugstore for 35 cents an hour. My experience in the drugstore paid off surprisingly well by the time I got to college and secured the manager's job at the Bullet Hole, the coffee hangout for students at Gettysburg College.
 펜실베니아의 Green tree 에 있는 우리 초등학교의 관리인은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는 늙은 현자로 보였다.  그 학교에 다녔던 다른 사람들은 윌리 (William Foley) 를 기억할 것이다.  그는 전체 건물을 위한 요리사와 병 세탁가였다. 조수는 없었다. 우리 중 일부가 벽과 창문을 닦고 페인트칠을 했던 여름의 몇 달을 제외한다면 그랬다.  우리는 모두 12 살 또는 13 살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동 노동법이 누구의 마음에도 들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우리의 임금은 1 달러 미만이었다.  그러므로 그 때 나는 또한 시급 35 센트로 약국에서도 일했다.  내 약국에서의 경험은 내가 대학에 가고 게티즈버그 대학에서 학생들을 위한 커피집인 Bullet Hole 의 매니저의 일을 얻어냈을 때 놀랄 만큼 도움이 되었다.  
 
 The experience working for Willy and listening to his philosophizing was stimulating. In a way, he probably taught me as much about life as any of my teachers. He could easily be a candidate for the most unforgettable character I have ever met.
 윌리를 위해 일하고 그의 사색을 들은 경험은 자극적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그는 나의 그 어떤 선생님보다도 삶에 대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쉽게 내가 이제까지 만났던 사람 중 가장 잊혀지지 않는 성격의 후보자가 될 수 있었다. 
 
 He talked about life struggles, but he also acted as a policeman of sorts. Though a "mere" janitor, he had some discipline authority, or at least bad behavior could easily be reported to higher authorities. But that's where he excelled, cautioning us, advising us, and mostly protecting us from stern discipline if certain events were to become known to the principal. The principal was a World War I veteran whose voice reflected exposure to poison gas in the fighting. He also believed in harsh corporal punishment. So most of us saw Willy as a trusted friend.
 그는 삶의 고생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일종의 경관으로 행동했다.  단순한 관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몇몇 규율을 세웠고, 나쁜 행동은 최소한 더 큰 권위자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우리에게 경고하고, 충고하고, 주로 교장에게 특정한 사건이 알려질 경우 생길 수 있는 엄격한 처벌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 교장은 전투에서 독 가스에 노출을 받은 적이 있는, 1 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퇴역 군인이었다.  그는 또한 심한 체벌의 필요성을 믿었다. 그래서 우리는 거의 윌리를 믿을 만한 친구로 보았다. 
 
 I recall one subject on which Willy did a bit of ranting. The "bankers" were the source of our problems, and I heard the charge more than once. I had no idea what he was talking about, and for years afterward wondered about it. Unfortunately, I didn't know enough to quiz him. But as the years went by, I surmised a few things.
 나는 윌리가 어떤 주제에 대해 큰 소리를 질렀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 "은행가" 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의 근원이었다.  나는 그 주장을 최소한 한번 이상 들었다.  나는 그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고, 오랫동안 그것에 대해 궁금해했다. 불행히도 나는 그에게 질문하기에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갔을 때, 나는 약간의 것을 추측하게 되었다.  
 
 Willy was old when he came to our school - it was a retirement job for him. He told stories of once being a glass blower and indicated that it was a high-paying job and allowed him to buy a fancy horse-drawn rig. Obviously, this was before automobiles.
 윌리는 그가 우리 학교에 왔을 때 이미 늙은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에게는 은퇴 일이었다.  그는 유리 직공이었던 적이 있다고 말했고 그것을 그에게 비싼 마차를 살 수 있도록 했던 보수가 높은 직업이었다고 말했다. 분명히, 자동차 이전에는 이것이 존재했다.  
 
 In thinking back, I decided he may well have been old enough to vote in 1896. Maybe he was influenced by William Jennings Bryan's populism and attacks on bankers. After many years, because I never forgot the charge that the bankers caused all our economic and political problems, I decided he was a product of the Populist-Progressive Era of the late 1800s and the early 1900s.
 회고해 보면, 나는 그가 1896 년 때 투표를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나이가 많았을 거라고 추측한다.  아마 그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의 포퓰리즘과 은행가를 향한 공격에 의해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긴 세월 이후, 나는 은행가가 우리의 모든 경제와 정치적인 문제를 야기했다는 그 주장을 결코 잊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1800 년대 후반부터 1900 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포퓰리스트-진보주의의 시대의 사람이었을 거라고 결정했다.  
 
 Although William Jennings Bryan was hardly a champion of our cause, he was a fan of Andrew Jackson's and early on was an enemy of central banking. In his "Cross of Gold" speech, Bryan shouted: "What we need is our Andrew Jackson to stand, as Jackson stood, against the encroachments of organized wealth!" Bryan credited Jackson with having destroyed "the bank conspiracy and saved America."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거의 우리 주장의 옹호자는 아니었지만, 그는 앤드류 잭슨의 팬이었고 초기에 중앙 은행의 적이었다. 그의 "Cross of Gold" 연설에서, 브라이언은 소리쳤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잭슨이 했듯이 조직적인 부의 침범에 대항할 수 있는 우리의 앤드류 잭슨이다."  브라이언은 잭슨이 "은행의 음모를 파괴하고 미국을 구했다고" 믿었다.  
 
 Bryan was no libertarian, but his attack on powerful banking interests should make us aware of the historical precedent for protests against these elites. Today's building coalition that is attacking current central banking operations might even be more radical; it is certainly more educated.
 브라이언은 자유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은행에 대한 강력한 공격은 우리로 하여금 이 엘리트들에게 항거한 역사의 선례를 알게 해 주었다.  현재의 중앙 은행 운영을 공격하는 오늘날 만들어지고 있는 단체는 심지어 더 근본적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확실히 더 교육받았다.  
 
 So far, the leadership of the Republicans and the Democrats has resisted any attack on the Federal Reserve, but that will probably change as blame for our current financial crisis can and should be laid squarely at the feet of the Fed. The money issue is once again becoming a key politicalissue.
 지금까지, 공화당과 민주당은 연방 준비 제도의 어떠한 공격에도 저항해 왔다. 그러나 현재의 금융 위기에 대한 비난은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의 근본에 가해져야 한다.  돈 이슈는 또 다시 한번 중요한 정치적 이슈가 되고 있다. 
 
 In an Economics 101 class at Gettysburg College, a bit of a revelation hit me when I discovered that most money was not money at all, but rather money substitutes. The economy thrives, I was told, on all of us circulating checkbook paper credits kept on a log at the bank. In my sheltered life, I thought we worked for money, paid our bills in money, and when we had too much on hand, we saved it in a bank and it earned interest. That's what I did with my pennies and quarters earned from lawn mowing and delivering papers and milk.
 게티즈버그 대학의 Economics 101 수업에서 대부분의 돈이 전혀 돈이 아니고, 화폐 대체물에 가깝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나는 일종의 계시를 받았다.  우리 모두가 은행에 기록된 수표장 종이 신용을 순환시킬 때 경제가 성공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 제한된 삶 속에서, 나는 우리가 돈을 위해 일하고, 돈으로 지불을 하고,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그것을 은행에 저금하고 이자를 받는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내가 잔디를 깎고 우유와 신문을 배달함해서 얻은 페니와 1/4 달러를 가지고 해 온 일이다.  
 
 But now, it was explained to me, the bank only had to have a fraction of the actual money on hand. I was told this facilitated economic growth through the concept of fractional-reserve banking. It made me question, but surely not enough, the system the professor was now explaining to me. In a way, it seemed to be a pretty neat trick.
 그런데 이제, 은행이 오직 실제로는 일부의 돈만을 가지고 있어도 된다는 것이 나에게 설명되었다.  나는 이것이 부분 준비금 제도라는 개념을 통하여 경제 성장을 용이하게 한다고 들었다.  그것은 나를 교수가 나에게 설명하는 것에 대해 불충분하게나마 질문하게 했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은 꽤 깔끔한 트릭인 것처럼 보였다. 
 
 My first reaction might have been something like Paul Begala's startling discovery, while serving in the Clinton administration, regarding executive orders: "Stroke of the pen, law of the land, kinda cool." Begala, of course, was ecstatic over the remarkable shortcut for passing laws by keeping Congress from interfering with the legislative process. That's how those who benefit from inflation must feel about the Federal Reserve System - "kinda cool."
 내 최초의 반응은 클린턴 행정부에서 행정 명령을 다루었던 폴 베가라(Paul Begala)의 놀라운 발견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펜으로 한번 그어서 법을 만들고, 참 괜찮군."  물론 베가라는 국회가 입법 과정을 통해 끼어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현저한 지름길에 환희했을 것이다.  그것은 인플레이션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연방 준비 제도에 대해 느껴야 할 생각이다.  "참 괜찮다." 
 
 The banks certainly enjoy the benefits of the current monetary system and the principle of fractional-reserve banking. Just like Begala, the recipients of the benefits that come from the fraudulent system of money are pleased with a shortcut to acquiring that money. Even after their scheme to enrich themselves falls apart, as it inevitably does, their expectations remain the same. They claim they provide an invaluable public service and deserve continued support from the public treasury. But this time it is happening more directly, through direct taxpayer-supported bailouts. Once this principle is established, the line grows longer and nearly everyone demands assistance.
 은행은 확실히 현재의 통화 시스템과 부분 준비금 제도로부터 오는 이익을 즐긴다.  베가라처럼, 돈의 사기로부터 수익을 얻는 사람들은 돈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에 기뻐할 것이다.  심지어 그들이 그들 자신을 부유하게 하기 위한 계획이 실패했을 때에도, 필연적으로 그렇듯이, 그들의 기대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들은 그들이 귀중한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재무부로부터 서포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금 그 일은 납세자가 지원하는 구제 금융을 통해 좀 더 직접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일단 이 원칙이 확립되면, 줄은 길어지고 거의 모두가 지원을 요구하게 된다.  
 
 The seeds of financial distrust were sown decades ago, as I discovered in a college class in the 1950s. The corrupt system lasted a long time, but now payback is upon us.
 금융에 대한 의혹의 씨는 내가 1950 년에 대학에서 발견했듯이 수십 년 전에 뿌려졌다.  그 부정한 시스템은 오래 지속되었고, 이제 그 대가는 우리가 지불해야 한다.  
 
 In the 1960s, I discovered the writings of economists such as Ludwig von Mises, F. A. Hayek, Murray N. Rothbard, and Hans F. Sennholz. I gradually found the answers I had been searching for. Even for the experts, it literally took centuries to fully understand the nature of money and the business cycle. Unfortunately, those in charge of our government and banking system are still denying the truth regarding money that was discovered many decades ago.
 1960년대에, 나는 미제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머레이 로스버드(Murray N.Rothbard)와 한스 센홀츠, 루드윅(Ludwig) 와 같은 경제학자의 집필을 발견했다.  나는 점차 내가 찾고 있었던 대답을 발견하게 되었다. 심지어 전문가들조차, 돈과 경기 순환의 성질을 충분히 이해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불행히도, 우리의 정부와 은행 시스템에 종사하는 이들은 여전히 수십 년 전에 발견된 돈에 대한 진실을 부정하고 있다.  
 
 While I was serving in the U.S. Air Force and stationed at Kelly Air Force Base as a flight surgeon, my next-door neighbor, a fellow physician, taught me something practical about the system. He understood hard money and was also influenced by his Mormon faith, which taught him self-reliance and frugality. I found out that on a regular basis he was sending off and buying uncirculated silver dollars. At the time, silver was still under $1.21 an ounce, and therefore the incentive to buy and melt silver dollars for their silver content did not exist. But he did, however, pay a premium over the normal value. Although the added cost was very small, it seemed a little strange to me that somebody would pay $1.05 for a silver dollar that could be obtained at the bank for $1.00 for routine purchases. The 5 percent extra was the cost for getting an uncirculated coin.
 내가 미 공군 에서 근무하고 켈리 공군 기지(Kelly Air Force Base)에 비행 외과의로 배치되어 있을 때, 내 동료 의사였던 주변 사람은 시스템에 대해 뭔가 실질적인 무언가를 가르쳐 주었다.  그는 경화를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에게 자력 갱생과 검약을 가르친 모르몬 교 신념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었다.  나는 그가 정기적으로 유통되지 않는 은 달러를 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때 은은 여전히 온스당  $1.21 아래에 있었으므로, 녹여서 은을 만들기 위해 은 달러를 살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나 그는 고정된 가치에 프리미엄을 지불했다. 더해지는 비용은 조금밖에 되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은행에서 $1.00 로 얻을 수 있는 은 달러에 $1.05 의 값을 지불하는 건 내게는 조금 이상하게 보였다.  5% 의 여분은 유통되지 않는 동전을 얻기 위한 비용이었다. 
 
 My friend's instincts were right about stocking up on silver dollars. It was not too many years later, in 1965, that silver was removed from the coinage. Even LBJ's claim that he would mint so many Kennedy half-dollars that the market would become saturated and force the coins to stay in circulation was wrong. He didn't understand Gresham's law (that money overvalued by the government will drive out money that is undervalued by the government), and the more he minted, which turned out to be a record number, the faster they were removed from circulation. Since silver never dropped below $1.21 an ounce, the Kennedy silver half-dollar never circulated to any degree.
 내 친구의 본능은 바로 은 달러를 사들이는 것 자체에 존재했다. 1965 년에 은이 화폐 주조로부터 제거될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포화 상태가 되어 동전이 계속 유통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많은 케네디 반 달러(Kennedy silver half-dollar)를 만들 거라는 존슨 대통령(LBJ)의 주장조차 잘못된 것이었다.  그는 정부에 의해 가격이 과대평가된 화폐는 정부에 의해 가격이 과소평가된 화폐를 내쫓는다는 그레샴의 법칙을 이해하지 않고 있었다.  더 많이 그가 돈을 만들어낼수록 그것들은 더 빨리 유통으로부터 사라져 갔다.  은이 온스당  $1.21 이하로 결코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케네디 반 달러는 어떤 경우에도 유통되지 않았다. 
 
 Another physician I knew during this time would periodically travel to Las Vegas and bring home a bag of silver dollars. These he got at face value. Silver dollars at the time were still being used in casino slot machines. Wouldn't that be fascinating, to watch and listen to real silver dollars being used? Credit cards, dollar bills, and tokens - how boring! And I don't even gamble.
 이 시기에 내가 알고 있었던 다른 의사는 정기적으로 라스 베가스로 여행했고 집에 은 달러가 든 가방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그가 액면가에 얻었던 이것들. 그 때 은 달러는 카지노 자동 판매기에서 아직도 사용되고 있었다.  진짜 은 달러가 사용되는 것을 보고 듣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지 않을까?  신용 카드, 달러 어음 그리고 명목 화폐들 - 얼마나 지루한가! 나는 심지어 도박을 하지도 않는다. 
 
 The monetary event that prompted me to enter politics occurred on August 15, 1971. That Sunday evening, Richard "We are all Keynesians now" Nixon announced the U.S. government would default on its pledge to deliver gold to any foreign government holding U.S. dollars at the rate of one ounce of gold for each $35.
 나를 정치의 길로 이끈 금융 이벤트는 1971 년 8 월 15 일에 일어났다.  그 일요일 저녁에, 리차드 "우리는 이제 모두 케인즈주의자들이다." 닉슨은 미국 정부가 미국 달러를 가지고 있는 어떠한 외국 정부에게든 온스당 $35 로 금을 교환해 줄 것이라는 약속을 어기겠다고 선언했다. ( 금 태환 정지 선언 : 역자주 ) 
 
 In addition, wage and price controls were put in place, along with a 10 percent import tariff. Instead of the markets collapsing, as I thought they should, the move was immediately praised by the Chamber of Commerce, and the stock market soared. The problems came a little bit later and lasted for a decade. The stock market rally quickly fizzled.
 나아가, 10% 의 수입 세율과 함께 임금과 가격 통제가 시작되었다.  시장이 폭락하는 대신, 나는 그래야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움직임은 상공 회의소에 의해 칭찬받았고 주식 시장은 급등했다.  문제는 조금 나중에 왔고 10 년 동안 계속되었다. 주식 활황장세는 빨리 사그라들었다. 
 
 This was the third broken promise by our government regarding gold backing to our dollar. Lincoln did it in the Civil War, and FDR did it in 1933when he confiscated gold from the American people and made it illegal for American citizens to own gold. Roosevelt took the gold at $20 an ounce and promptly revalued it at $35. The citizens lost, the government profited.
 이것은 우리 달러의 금 태환에 대해 우리 정부가 어긴 세 번째 약속이었다. 링컨은 내전 때 그 일을 했다. 그리고 루즈벨트 대통령(FDR)은 미국인의 금을 몰수하고 미국 시민이 금을 소유하는 것을 불법화했던 1933 년에 그것을 했다.  루즈벨트는 $20 의 금에 1 온스의 금을 가져가고 신속히 그것의 가치를  $35 로 재평가했다.  시민이 손실을 보고 정부는 이익을 얻었다. 
 
 Profits from this process were used to initially fund the Exchange Stabilization Fund, which is still in operation today. It is a slush fund hidden from the scrutiny of the Congress and has already used $50 billion in the current bailout process. It is a self-funding operation, earning enough interest from the Treasury to do at will what they want. Under the law, it is still permitted to meddle in the gold market, which I suspect it does.
 이 과정에서 생긴 수입은 지금도 가동 중인 환율 안정 기금에 자금을 공급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것은 국회의 정밀 조사로부터 순겨져 있는 비자금이고 이미 현재의 긴급 구제 과정에서 50 억 달러를 사용했다.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는 데 충분하도록 재무부로부터 이익을 얻는 스스로 자금을 조달하는 운영이다.  법 아래에서 그것은 아직도 금 시장에 간섭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Tragically, the courts supported this illegal theft by Roosevelt from the people and ruled that all private and government promises to pay bondholders in gold were null and void. So much for Article 1, Section 10, which places responsibility on the federal government to protect contracts, not to deliberately break them.
 불행히도, 법정은 루즈벨트의 이 불법적인 절도를 지지했고 채권을 금으로 지급하겠다는 정부와 민간의 모든 약속은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했다.  헌법 제 1 조 10 항은 연방 정부에 계약을 고의로 깰 것이 아니라 보호할 의무를 주고 있다.  
 
 August 15, 1971, was a major event in the history of the American dollar. In many ways, it was saying the U.S. government was insolvent - it could not meet its monetary commitments. The worldwide run on the American system arrived and the United States refused to pay. A fiat dollar reserve standard replaced the Bretton Woods pseudo-gold standard. There was nothing unexpected here. The failure of Bretton Woods was predicted early on by the Austrian economists, especially Henry Hazlitt, who was writing daily articles for the editorial page of the New York Times. Austrian school economists also knew, even in 1971, that the new paper standard would not provide stability to the financial system.
 1971년 8월 15일은 미국 달러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이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그것은 미국 정부가 지불 불능의 상태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것은 그 금융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전 세계에서 미국 시스템을 추궁했으나 미국은 지불하는 것을 거부했다.  달러 본위제는 브레튼 우즈의 가짜 금 본위 제도를 대체했다. 이것은 예상되지 않은 일이 아니었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실패는 일찍이 오스트리아 학파의 경제학자들, 특히 뉴욕 타임즈에 기사를 쓰고 있었던 헨리 헤즈리트(Henry Hazlitt)에 의해서 예견되었다.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들은 또한 1971 년에 이미 새로운 지폐 본위 제도가 금융 시스템에 안정을 제공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The shift to a new monetary regime was an unprecedented experiment in global monetary planning, a wholesale plunge into the world of paper currency. With no backing for the dollar at all, Americans became completely reliant on the Federal Reserve to manage our money and to do so without any outside discipline.
  새로운 화폐 체제로의 이동은 지폐 세계에 대규모적인 폭락을 가져온 세계 금융에 대한 전례 없는 실험이었다. 달러를 뒷받침해 줄 무언가가 전혀 없었고, 미국인들은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가 아무런 규율도 없이 우리의 돈을 경영할 권한에 완전히 의존하게 되었다.  
 
 The chaos was dramatic. The dollar was sharply devalued, and price inflation became a major problem in the decade of the 1970s, as did steadily rising interest rates. But what impressed me most was that the Austrian economists who made predictions a long time ago were proven correct.
 카오스는 극적이었다. 달러는 급격히 평가절하되었다. 그리고 물가 인상은 1970년대의 10년 동안 주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것은 꾸준히 금리를 오르게 했다. 그러나 내게 가장 큰 감명을 준 것은 오스트리아 경제학자들이 아주 오래 전에 한 예언이 정확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It was the consequences of this event in 1971 that prompted me to decide on a lark in late 1973 to run for Congress in 1974. Texas was still a Democratic state, and had only three Republicans in a delegation of twenty-four congressmen. The district I was running in had never been held by a Republican. In 1974, it remained a Democratic district.
 1974 년을 위해 내가 1973 년 말에 국회에 입후보하게 한 것은 이 사건의 결과였다.  텍사스는 여전히 민주당의 주였고, 24 명의 하원 의원 중 오직 3 명의 공화당원이 있을 뿐이었다.  내가 후보로 달린 주는 절대로 공화당이 주도권을 잡은 적이 없는 곳이었다.  1974 년에는, 그것은 민주당의 주로 남았다. 
 
 My first victory didn't come until a special election in the spring of 1976. At the time, I was just anxious to have a forum in which to talk about monetary policy and its relationship to the inexorable growth of our federal government. I was as surprised as anyone that this effort to spread a message about monetary policy and freedom would lead to a career of sorts in politics.
 나의 첫번째 승리는 1976 년 봄의 특별한 선거 이전에는 오지 않았다. 그 때에, 나는 그저 금융 정책과 그것이 우리의 연방 정부의 용서할 수 없는 성장과 갖는 관계에 대해 말하는 포럼을 가지기를 열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이 금융 정책과 자유에 대한 메세지를 퍼뜨리려는 노력이 일종의 정치 경력이 된 것에 대해 놀랐다.  
 
 I was convinced that if one did not play the role of Santa Claus or errand boy for a district, it would be impossible to win a seat in the U.S.Congress. My wife, Carol, warned me at the time that running for Congress could be dangerous: "You could end up winning." I dismissed her concern and didn't anticipate that I had a chance. I was pleasantly surprised.
 나는 누군가가 한 지구에서 산타 클로스나 심부름꾼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면 미국 하원의 자리에 앉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내 아내, 캐롤(Carol)은 그 때에 내게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것이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당신은 이겨 버릴지도 몰라."  나는 그녀의 염려를 잊어버리고 내게 이길 기회가 있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나는 좋은 의미에서 놀라게 되었다.  
 
 As significant as the events of the 1970s were, the financial chaos we are now witnessing is much more significant. The fact that the system was held together for longer than many Austrian economists expected only means that the financial bubble, the debt, the malinvestment, and the international imbalances would become that much greater.
 1970 년대의 사건이 중요했듯이,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금융 혼란은 훨씬 더 중요하다.  시스템이 대부분의 오스트리아 경제학자들이 예상한 것보다 오래 지속되었다는 사실은 오직 금융 거품과 빚, 오투자와 국가간의 불균형이 그만큼 커질 것이라는 걸 의미할 뿐이다. 
 
 The market made every effort to correct monetary mistakes of these past thirty-seven years. The Federal Reserve was able to minimize the corrections only to guarantee the current BIG ONE down the road. That, of course, means worldwide depression worse than the 1930s, unless we wake up rather quickly.
 시장은 지난 37 년간 계속된 금융 정책의 실수를 정정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했다. 연방 준비 제도는 현재의 큰 것을 나중으로 미룸으로써 정정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빨리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1930 년대보다 나쁜 세계적인 경제 침체가 올 지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Dangerous times are indeed with us, and we will be forced to devise a new monetary system just as we were required to do at the end of the Bretton Woods system. But there is no looking back, no return to the old 1944 agreement. Today, there's still wishful thinking, but the fiat dollar reserve standard that the world has blindly accepted for more than three decades is dying and the financial structure is disintegrating. What we decide to do now will affect the well-being of American citizens for decades to come. There's no returning to the fiat dollar standard that evolved after August 15, 1971.
 우리는 정말로 위험한 시대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브레튼 우즈 체제의 붕괴 때 그랬듯이 새로운 통화 제도를 고안할 것을 강요받고 있다.  그러나 돌아볼 것은 없다.  1944 년으로의 복귀는 없다.  지금은 아직 희망적인 기대가 있다.  그러나 30 년 간 세계가 맹목적으로 받아들였던 달러 본위 제도는 죽어가고 있으며 금융 구조는 붕괴되고 있다.  지금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다음 수십 년 간의 미국인들의 안녕을 좌우할 것이다.  1971 년 8 월 15 일 후로 발전해 온 달러 본위제로 돌아갈 길은 없다.  
 
 The 1970s were hectic, and establishment economists were mystified by a stagnant economy and rampant price inflation, prompting a new term to describe the conditions: stagflation.
 1970년대는 굉장했다. 그리고 정체된 경제와 엄청난 물가 상승에 경악한 경제학자들은 그 상황을 묘사하는 또 다른 단어를 만들었다.  스테그플레이션.

 Being in Congress in the late 1970s and early 1980s and serving on the House Banking Committee, I met and got to question several Federal Reserve Board chairmen: Arthur Burns, William G. Miller, and Paul Volcker.
 1970 년대 말부터 1980 년대 초에 하원의원으로 활동하고 하원 은행 위원회(House Banking Committee)에서 근무하면서, 나는 몇 명의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 의장을 만나 질문을 하게 되었다: 아더 번스(Arthur Burns), 윌리엄 밀러(William G. Miller), 그리고 폴 볼커(Paul Volcker).

 Of the three, I had the most interaction with Volcker. He was more personable and smarter than the others, including the more recent board chairmen Alan Greenspan and Ben Bernanke. In my second tour of congressional duty starting in 1997, I had the opportunity to quiz them.
 세 명 중 나는 볼커와 가장 많은 교류를 가졌다.  그는 최근의 의장인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과 벤 버냉키 두 명보다 더 단정하고 영리한 사람이었다.  1997 년에 시작된 내 두 번째 하원 업무 여행에서, 나는 그들에게 질문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In 1980, a major piece of banking legislation, the Monetary Control Act, was passed; many considered it a prelude to the savings and loan crisis in that decade. I expressed my concern to Chairman Volcker at a hearing that reserve requirements could be lowered to zero and the Federal Reserve could buy any asset, including foreign debt.
 1980년의 은행업 법률(Monetary Control Act) 은 그냥 넘어갔다; 대부분은 그것을 그 시대에 있었던 금융과 빚 위기의 전주곡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청문회에서 볼커의장에게 지불 준비금이 0 으로 떨어질 수 있고 연방 준비 은행이 외국의 빚을 포함한 어떠한 자산이든 살 수 있는 것에 대해 염려를 표했다.  
 
 Volcker invited me to a private breakfast to dissuade me from my interpretation. Lew Rockwell, my chief of staff, went with me to the breakfast. Interestingly, we arrived early and were talking with Volcker's aide when Volcker arrived. Before acknowledging Lew or me, he quickly went to his aide and asked, "What's the price of gold - "
 볼커는 개인적인 아침 식사에 나를 초대했고 내가 나의 해석을 그만두도록 설득했다.  나의 보좌관인 류 록웰(Lew Rockwell)이 나와 함께 아침 식사에 동석했다. 재미있게도, 우리는 일찍 도착했고 볼커가 도착하기 전에 그의 보좌관과 말하고 있었다.  류나 나를 눈치채기 이전에 그는 빨리 그의 보좌관에게 왔고 물었다.  "금 시세가 어떻게 - " 
 
 At the time, the price of gold was soaring, and there was deep concern about inflation and the dollar's value on the international exchange markets. I believe central bankers are always looking at the price of gold, because they know what many of us know: in the long term, the best gauge for the soundness of a currency is the gold price.
 그 때, 금 시세는 급등하고 있었고 인플레이션과 국제 환율 시장에서의 달러의 가치에 대한 깊은 우려가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중앙 은행의 직원들이 항상 금 시세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장기적으로, 통화의 건전성을 알아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척도는 금의 가격이다.  
 
 The fallacy is that they believe if the gold price can be held in check, even artificially, it conveys confidence in the currency and the banking system. Defying market forces that want a higher price for gold by artificial means can only work temporarily. The market, or the black market if necessary, will always set the real prices of everything. Eventually, artificially fixing the price of gold will break down.
 오류는 그들이 만약 금의 가격을 억지로라도 붙들어 맬 수 있다면 통화와 금융 시스템에 대한 신뢰감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금에 더 높은 가격을 책정하기를 원하는 시장의 힘을 인공적으로 문제 삼지 않는 것은 오직 일시적으로만 작동할 뿐이다.  시장, 또는 만약 필요하다면 암시장은 항상 모든 것의 진짜 가격을 붙인다. 궁극적으로, 금 시세를 인공적으로 고정시키는 것은 실패한다. 
 
 That's what happened in 1971. Dumping nearly 500 million ounces of gold at $35 an ounce in the 1960s never stopped the depreciation of the dollar. Still, central bankers were determined to keep a lid on the dollar price of gold. Volcker was called to the Fed to stop the inflation, and obviously he was intensely interested in the price of gold. The gold price was the crucial test for him, since by then the Fed had long given up on pretending it could "fix" the gold price forever. That effort, of course, was abandoned in 1971 with the closing of the gold window.
 그것이 1971년에 일어난 것이다. 1960년대에 거의 5 억 온스의 금을 $35 로 버린 것은 달러의 가치 하락을 절대로 멈추지 못했다.  여전히, 중앙 은행 직원은 달러 금 시세를 유지할 결심이 있었다. 볼커는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가 인플레이션을 멈추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명백히 그는 금 시세에 강력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는 그것이 금의 가격을 영원히 고정시킬 수 있다고 속이는 것을 오래 전에 포기했었으므로 금의 가격은 그에게는 중요한 테스트였다.  그 노력은, 물론 1971 년에 금의 창구를 닫아 버림으로써 포기되었다.  
 
 Volcker, as an assistant secretary of the Treasury in 1971, expressed great doubt about the wisdom of that particular move regarding gold. Casual conversation with Volcker as recently as 2008 confirmed these concerns, but he assured me that a gold standard was not the answer to today's problem.
 1971 년에 재무부의 차관이었던 볼커는 금을 보는 특정한 움직임에 대해 의심을 표현했다.  최근 2008 년의 볼커와의 짧은 대화는 이 염려를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금 본위제가 오늘날 문제점의 해결책이 아니라고 내게 보증했다.  
 
 The breakfast went well, and he was quite cordial. This is not something Greenspan ever invited me to do; nor do I expect an invitation anytime soon to a private breakfast and discussion with Bernanke. At the end of the breakfast, Volcker finally agreed that my interpretation of the language was correct, but assured me he would never lower reserve requirements to that degree or buy up worthless assets. His argument was that the Fed wanted this authority to have free rein in raising reserve requirements at will, as he indeed did with interest rates that broke the back of the raging inflation of the 1970s. As we were leaving, I said that, although I didn't expect that he would use these extreme powers, who knew if in the future we might just have someone who would. The future is now here.
 아침 식사는 성공적이었으며 그는 거의 진심이었다.  이것은 그린스펀이 날 초대했을 때 내게 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버냉키가 빠른 시일 내에 나를 초대하여 대화를 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아침 식사의 끝 무렵에 볼커는 마침내 언어에 대한 나의 해석이 정확하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절대 준비금을 그 정도로 낮추거나 무가치한 자산을 사지 않을 것이라고 보증했다.  그의 요지는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가 이 권위를 지불 준비금을 자유롭게 올리기 위해 원한다는 것이다.  그가 이자율로 1970 년의 폭발적인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그렇게 했듯이. 우리가 떠날 때, 나는 그가 그 엄청난 힘을 사용하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언젠가 우리가 그렇게 할 사람을 만나게 될 지 누가 아느냐고 말했다. 그 미래가 지금 여기에 있다. 
 
 The fact is that not only has this come to pass with Bernanke, but a great deal more authority has been usurped by the Fed, while Congress says little about it. The Fed today has ominous powers that Congress barely understands. There is essentially no oversight, no audit, and no control. And the Fed is protected by the Federal Reserve Act. That's why the Federal Reserve chairman has no obligation to answer questions that relate to Federal Open Market Committee meetings and actions taken in collusion with other central banks. Trillions of dollars can be created and injected into the economy with no obligation by the Fed to reveal who benefits. Lawsuits and freedom of information demands will not shake this information loose.
 진실은 이것이 버냉키 때에 실현되었을 뿐 아니라, 의회가 그것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 사이에 더 많은 권한이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에게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는 오늘날 국회가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불길한 힘을 가지고 있다.  실질적으로 어떠한 감시도, 어떠한 감사도, 어떠한 통제 수단도 없다.  그리고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는 연방 준비법에 의해 보호된다. 이것이 연방 준비 제도 의장이 연방 공개시장 위원회 회의와 관련이 있는 질문에 대답할 의무를 가지지 않으며, 다른 중앙 은행들과 결탁하는 이유이다.  연방 준비 제도는 누가 그로부터 이익을 보는지 드러내지도 않고 수조 달러를 만들고 경제에 투입할 수 있다. 소송과 정보의 자유에 대한 요구는 이 정보를 느슨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Arrogant is a mild word to describe the attitude of those who control our monetary system. When Bernanke was pressed to reveal further information about where the trillions of dollars were going from the Fed, the answer was quite clear: "We think that's counterproductive," that is, to reveal this information.
 거만하다는 표현은 우리의 통화 제도를 통제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묘사하는 말 치고는 온건한 편이다.  버냉키가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로부터 수조 달러가 어디로 갔는지 드러내라는 추궁을 받았을 때 그의 대답은 아주 명료했다: "우리는 그것이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이 정보를 폭로한다.  
 
 My first exposure to the Austrian school of economics was through reading The Road to Serfdom by F. A. Hayek in the early 1960s. Hayek, in the middle of the financial chaos following the breakdown of Bretton Woods, won the Nobel Prize in 1974 for his work on the economics of the business cycle. He is well known today for his work on competing currencies, developed in the market, along with the notion that a basket of currency may suffice as reserves. The basket of currency idea was something I never had a great affinity for, but I always accepted the idea that if it was developed by a nongovernment entity, no fraud involved, and it worked, so be it. It certainly would be superior to government fiat money.
 오스트리아 학파와 나의 최초의 만남은 1960 년대 초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이라는 저서를 읽음으로써 이루어졌다. 하이에크는 브레튼 우즈 체제 붕괴에 뒤따른 경제적 혼란의 중심에서, 경기 순환에 대한 연구로 1974 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오늘날 그는 시장에 기초한 경쟁 통화에 대한 연구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생각에 의하면 수 많은 통화가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수 많은 통화라는 아이디어는 내가 절대 크게 친근감을 가지고 있는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민간의 존재에 의해 개발된 것이고 사기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그리고 그것이 잘 작동한다면 언제든지 그 아이디어를 받아들인다.  그것은 정부의 불태환 지폐보다는 확실히 뛰어날 것이다. 
 
 Many years after reading The Road to Serfdom, I had the pleasure of hearing Hayek lecture in Washington, around 1980. Following that meeting, we had a private dinner together and spent several hours visiting. This dinner, which I remember well, further solidified my interest and confidence in Austrian economics.
 노예의 길을 읽은지 몇 년 후에, 나는 1980 년 경 워싱턴에서 하이에크의 강의를 듣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그 회의 후에 우리는 함께 식사를 하고 몇 시간 동안 만났다.  내가 잘 기억하고 있는 이 저녁 식사는 오스트리아 경제학에 대한 나의 관심과 신뢰감을 더 굳혀 주었다.  
 
 Early on, I had heard Ludwig von Mises lecture at the University of Houston. This was probably in 1972, a year before his death. At that time I was extremely busy with my medical practice but saw a very small newspaper notice that Mises would be lecturing at the university on a weekday. I knew there was only one other physician in the town of Lake Jackson, Dr. Henry May, who would care about such an unusual event. I called him to see if he cared to travel the fifty miles to hear Mises. We rearranged our office schedules and made the trip.
 초기에 나는 휴스턴 대학에서 루드비히 폰 미제스의 강의를 들었다.  아마 그가 죽기 1 년 전인 1972 년에 있었던 일일 것이다.  그 때 나는 의학 실습으로 상당히 바빴다.  그러나 나는 매우 작은 신문이 미제스가 주말 동안 대학에서 강의할 것이라고 공지한 것을 보았다. 나는 이런 생소한 이벤트에 관심을 갖는 의사는 잭슨 호(Lake Jackson)도시에는 한 명, Dr. 헨리 메이(Henry May)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미제스의 강의를 듣기 위해 50 마일을 여행할 수 있다면 보자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 사무실의 스케줄을 재배치하고 여행을 했다. 
 
 Mises, at the time, was elderly but sharp. His subject was socialism, and his lecture explained why socialism always fails due to the absence of a free market pricing structure for capital goods. He was on his last lecture tour of the United States, and Houston may well have been his last stop. (Mises died on October 10, 1973, at ninety-two years of age.)
 그 때 미제스는 나이가 지긋했지만 날카로웠다. 그의 주제는 사회주의였다.  그리고 그의 강의는 왜 사회주의가 상품에 대한 자유 거래 시장 가격 체계의 결여 때문에 실패하는지를 설명했다. 그는 그의 미국에서의 마지막 강의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휴스턴은 그의 마지막 목적지였다.  ( 미제스는 1973 년 10 월 10 일에.92 세의 나이로 죽었다. ) 
 
 Not to our surprise, the university did not give him a prestigious reception. The lecture was held in a modest-sized classroom, but the place was overflowing. Popularizing Austrian economics at the time was in its very early stages, but it was obvious even then that there was a starvation for truth in economics. The early 1970s were truly hectic, and since gold prices were soaring and the dollar was dropping more and more, people were searching for solutions. Today, of course, the problems are so much worse and the need for answers even more urgent.
 놀랍지 않게도, 대학은 그에게 만족스러운 대접을 해 주지 않았다.  강의는 보통 크기의 교실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그 장소는 붐비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경제학의 대중화는 그 당시 매우 이른 단계에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경제학에서 진실을 찾으려는 열망이 있었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1970 년대 전반은 정말로 대단했다. 금 가격이 급등하고 있었고 달러 가치는 점점 더 하락하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해결책을 찾고 있었다. 오늘날은 물론 문제가 훨씬 더 나쁘므로 대답을 찾으려는 요구도 훨씬 더 긴급해졌다.  
 
 To say the least, my trip to Houston to hear Mises in person was an inspiration. I suspect that when the definitive history of the twentieth century is written, Mises will be considered one of the greatest economists, if not the greatest, of the century. That recognition won't come soon, because those in charge of the economic catastrophe are in total denial as to how they, who are now trying to rescue the system, caused all the problems we face. The universities are still cluttered, as is Washington, with Keynesians and socialists who refuse to give the slightest credibility to eliminating the central bank and instituting sound money. But this is changing, and fifty years from now, if we aren't driven into some dark age by our refusal to reassert the principles of liberty, the Austrian economists, and in particular Mises, will receive their due respect.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미제스의 강의를 스스로 들을 수 있었던 휴스톤으로의 나의 여행은 감명깊었다. 나는 20 세기의 정확한 역사가 써질 때에, 미제스가 이 세기의 가장 훌륭한 경제학자 중 하나로 간주될 거라고 생각한다.  빠른 시일 내에 인정받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경제적 대참사를 다루는 이들은 어떻게 그들 - 지금은 시스템을 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 이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점들을 만들었는지에 대해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가는 여전히, 워싱턴이 그렇듯이, 중앙 은행을 제거하고 건전 통화를 제정하는 일에 최소한의 경청도 주기를 거부하는 케인즈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로 어수선하다. 그러나 이것은 바뀌고 있고, 50 년쯤 후에는, 만약 우리가 자유의 원칙을 재확립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일종의 암흑기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오스트리아 경제학자들, 특히 미제스는 당연히 받아야 할 존경을 받을 것이다. 
 
 My interest in Austrian economics, and especially monetary policy, naturally directed my attention to the ongoing effort to legalize gold in America. Since Roosevelt's edict on April 5, 1933, Americans were prohibited from owning gold. Only about three countries in the 1970sprohibited their citizens from owning gold, one being the Soviet Union.
 오스트리아 경제학과, 특히 금융 정책에 대한 나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미국에서 금을 합법화하려는 노력에 향했다.  루즈벨트의 1933 년 4월 5일 칙령 이래로 미국인이 금을 소유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1970 년대에는 오직 3 개의 국가만이 그들의 시민이 금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 중 하나는 소련이었다.  
 
 Roosevelt, by executive order (6102) in 1933, confiscated all gold held by private citizens, with a few minor exceptions such as numismatic coins, and levied severe penalties on those who disobeyed. The penalty was $10,000 and/or ten years in prison. In today's money, that's more like$400,000. It was a rather bold, arrogant move from which much harm has come.
 1933년의 실행 명령 (6102) 에 의해.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는 오래된 동전 같은 약간의 예외를 제외한 개인이 가진 모든 금을 몰수하고, 이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엄격한 처벌을 부과했다.  처벌은 $10000 또는 감옥 안에서 10 년을 보내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돈으로 치면 그것은 $400,000 에 달한다.  그것은 많은 해로운 결과를 초래한 가져 온 대담하고 뻔뻔한 움직임이었다.  
 
 Today, as standard policy, Congress condones presidential executive orders, signing statements, judicial legislation, and agency regulations as all being permissible. Although it was a major event to confiscate gold, complaints were minimal. The crisis atmosphere and the need for the government to solve the economic crisis associated with the Depression squelched any complaints about the usurpation of power by FDR.
 오늘날 표준 약관으로 국회는 대통령의 실행 명령과 특별 성명, 재판에 의한 입법, 대리 규정을 모두 허가하고 있다.  비록 그것이 금을 몰수하는 중대한 이벤트였지만, 불평은 최소였다. 위기 분위기와 정부가 대공황과 관련된 경제 위기를 해결해 달라는 요구는 권리 침해에 대한 모든 불평을 루즈벨트 대통령의 힘으로 부수게 했다.  
 
 Since our crisis today may well evolve into something greater than what we suffered in the 1930s, we can only imagine, in this post 9/11 atmosphere, how much authority will be wielded by the executive branch. The only question is, will the American people resist, and if so, when?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위기는 우리가 1930 년대에 겪었던 것보다 더 큰 것들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지난 9/11 분위기 속에서 얼마나 행정부의 권위가 행사되었지에 대해 우리는 추측만 해볼 수 있을 뿐이다. 유일한 질문은, 미국인들이 저항할 것인가이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언제?
 
 At least the Roosevelt executive order was eventually reversed - not by a president who could have revoked the order, but finally by Congress responding to the pressure put on them by grassroots Americans. The system can work and did in January 1975, when Americans once again could own gold bullion coins.
 최소한 루즈벨트의 실행 명령은 결국에는 파기되었다. - 그것을 파기할 수 있는 대통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회가 미국 대중의 압력에 응답하여 그것을 파기했다. 시스템은 다시 작동할 수 있었고 1975 년 1 월에 그렇게 했다.  미국인들은 다시 금괴 동전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Much credit has to be given to the late Jim Blanchard for his National Committee to Legalize Gold, which published a newsletter strictly to lobby for gold legalization.
 많은 칭찬은 짐 블랜처드(Jim Blanchard) 와 로비에 금 합법화에 대한 뉴스 레터를 발표한 그의 National Committee to Legalize Gold 에게 돌아가야 한다. 
 
 Interestingly (and we were reminded of this during my presidential campaign), he had a biplane towing a banner over Nixon's 1973inauguration parade saying "Legalize Gold." A freer America! Today that plane might be shot down. But it was President Ford who permitted once again ownership of gold. The authorities feared this move because the gold "price" is the ultimate test of value of a currency. Since the dumping of nearly 500 million ounces of gold in the 1960s didn't prevent the run on the dollar, the international authorities were determined to punish those "speculators" who were "hoarding" gold.
 재미있게도, (그리고 우리는 나의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이것을 상기하게 되었다) 그는 "금을 합법화하라" 라고 하면서 닉슨의 1973 년 취임 퍼레이드 위를 깃발을 끌고 복엽기로 날았다.  더 자유로운 미국!  지금이라면 그 비행기는 격추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금의 소유를 다시 허락한 것은 포드 대통령이었다.  금의 가격은 통화의 가치를 결정하는 궁극적인 테스트였기 때문에 당국은 이 움직임을 두려워했다.  1960 년대에 거의 5 억 온스의 금을 덤핑한 것도 달러의 가치 하락을 막지 못했으므로 국가 당국은 이 금을 "축적" 하고 있는 "투기꾼" 들을 처벌하기로 결정했다.  
 
 The gold price was bid up from $35 an ounce to $195 between 1971 and 1975, with the anticipation that the price would move even higher with American citizens coming into the market. Since the anticipated price increase was already discounted, traders were willing to sell, which they did, and gold went down precipitously from $195, and eventually to $102 by August 30, 1976. But it was more than just an adjustment by the traders. A concerted U.S. Treasury and IMF effort to knock the price down by dumping tons of gold onto the market served to put more pressure on the price decline. But obviously, it didn't last, and gold resumed its upward movement.
 금 가격은 미국 시민들이 시장에 들어오면 더욱 올라갈 것이라는 예측과 함께 1971 년과 1975 년 사이에 $35 에서 $195 까지 올라갔다.  예상된 가격 인상이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거래 업자들은 팔기를 원했고 그렇게 했다.  금은 1976년 8월 30 일에는 $195 에서 $102 까지 내려갔다.  그러나 이것은 어래 업자들에 의한 것만이 아니었다.  시장에 수 톤의 금을 버림으로써 가격을 떨어뜨리려는 미국 재무부와 IMF 의 노력은 가격 저하에 더 큰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명백히,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금은 다시 상승 추세를 회복했다.  
 
 Even today, the government and central banks have an intense interest in not allowing the gold price to send a no-confidence signal to the world of just how weak the dollar is. Central banks in recent years have been selling constantly, and I'm strongly suspicious that the President's Working Group on Financial Markets - the "Plunge Protection Team" - participates in the gold market as well to keep the price suppressed.
 심지어 지금조차도 정부와 중앙 은행들은 금 가격이 세계에 얼마나 달러가 약한지 신호를 보내는 것을 막는 일에 관심이 많다.  최근의 중앙 은행들은 꾸준히 팔고 있다. 그리고 나는 대통령의 금융 시장에서 일하는 그룹 - "증시붕괴방지팀(Plunge Protection Team)" - 또한 가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금 시장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말 의심스럽다.  
 
 As recently as November 2008, Bernanke admitted to me in a Financial Services Committee hearing that the only time gold is discussed with other central bankers is for the purpose of selling - never to consider its merit in serving as a reserve for a new currency agreement.
 2008 년 11 월 정도의 최근에, 버냉키는 나에게 Financial Services Committee 에서 금이 논의될 때는 오직 팔기를 위한 것이라는 - 새로운 통화 동의를 위한 준비금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그것의 이점을 고려하지도 않고 - 사실을 들을 수 있게 했다.  
 
 Before gold became legal to own in 1975, many gold bugs were buying it. I purchased my first gold shortly after the breakdown of the Bretton Woods Agreement. The law was circumvented by buying numismatic coins (any coin dated 1947 or older was considered a numismatic coin).Mexico accommodated American citizens by minting the beautiful Mexican 50 peso, weighing 1.2 ounces, and placing the date 1947 on it. The coins I bought at that time for financial security I still have, and now they are getting close to being legitimate numismatic coins.
 금이 1975 년 불법이 되기 전에, 많은 금 본위제 지지자들은 그것을 사고 있었다.  나는 브레튼 우즈 협정의 파손 이후 나의 첫번째 금을 구입했다.  법은 오래된 동전들 ( 1947 년이나 더 오래 전에 만들어진 어떤 동전이라도 오래된 동전으로 취급된다 ) 을 통해 빠져나갈 수 있었다.  멕시코는 1.2 온스의 무게가 나가는 아름다운 멕시코 50 페소 동전을 제조하고 날짜를 1947 년으로 함으로써 미국 시민들을 도왔다.  내가 그때 산 동전들은 내가 지금도 가지고 있는 금융 보안이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정당한 오래된 동전에 가까워지고 있다.  
 
 Jim Blanchard almost single-handedly led the successful effort to legalize gold ownership. He held his first gold conference in 1974 in New Orleans and I attended this conference. A small crowd of a few hundred was expected, but a much larger crowd of more than 700 showed up.
 짐 블랜처드는 금의 소유를 합법화하기 위한 성공적인 노력을 이끌어낸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그의 첫번째 금 회의를 1974 년 뉴올리언스에서 개최했고 나는 그의 회의에 참석했다.  수백의 적은 청중이 예상되었지만, 700 명이 넘는 훨씬 많은 청중들이 나타났다.  
 
 It was there I met Hans Sennholz, one of the speakers. Sennholz was one of only six individuals who received a PhD under Mises. I got to know Sennholz over the years, attending events in Grove City where he was the chairman of the Economics Department. He even came for a campaign event for me in 1974, which I recall was totally perplexing to my campaign manager, who was not exactly into gold and the Federal Reserve. When Sennholz was president of the Foundation for Economic Education (FEE) after retiring from Grove City College, he had me join the board, which prompted a few visits to FEE's headquarters in Irvington-on-Hudson, New York.
 나는 거기서 연설자 중 하나였던 한스 센홀츠를 처음 만났다.  센홀츠는 미제스로부터 PhD를 받았던 단 6명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나는 센홀츠를 오랫동안 알고 있게 되었다.나는 그가 경제학 부서의 회장이었던 작은 숲 시티에서 이벤트에 참석했다.  그는 심지어 1974 년에 나를 위한 캠페인 이벤트에 참가하기도 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금과 연방 준비 제도의 문제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의 캠페인 매니저를 난처하게 했다는 것이다.  센홀츠가 Grove City College 대학에서 은퇴한 후 경제교육재단(Foundation for Economic Education)(FEE) 의 의장이었을 때에, 그는 내게 위원회에 가입하게 했다. 그것은 뉴욕 어빙턴 허드슨(Irvington-on-Hudson)에 있는 FEE 의 본사에 몇몇이 방문하도록 촉진했다.  
 
 In 1974, I had met and came to respect highly Leonard Read, founder of FEE. He served a great purpose following World War II in keeping the freedom movement alive and encouraging many others to participate in this crucial endeavor. Leonard was much more interested in education than politics. Even so, once I was in Congress, he had me visit FEE on a couple of occasions. I'm sure he was pleased I was in Congress, but he understood, as I do, that education is the key to political change. I have no problem with those who say education is the most important thing, but eventually a theoretical philosophy has to be translated into political actions - and that's exactly what the Founders did.
 1974년에, 나는 FEE 의 창설자인 레너드 리드(Leonard Read)를 만나고 그에게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그는 2 차 세계 대전 후에 자유의 움직임을 살아 있도록 하겠다는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다른 사람들을 이 필수적인 노력에 참여하도록 권했다.  레너드는 정치보다 교육에 훨씬 흥미가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국회에 잇었을 때, 그는 내가 몇몇 기회에 FEE 를 방문하도록 했다. 그는 내가 국회에 있는 것을 환영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는, 내가 그렇듯이, 교육이 정치적 변화의 핵심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교육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전혀 이의가 없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론적인 철학은 정치적인 행동으로 변환되어야 한다. - 그리고 그것이 정확히 건국자들이 한 일이다.  
 
 Mises had something to say about this: "The flowering of human society depends on two factors; the intellectual power of outstanding men to conceive sound, social and economic theories and the ability of these or other men to make these ideologies palatable to the majority."
 미제스는 이것에 대하여 할 말이 있었다: "인간 사회를 꽃피우는 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사회적, 경제적 이론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지성인의 힘, 그리고 이 이데올로기들을 대중화하거나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다." 
 
 In my opinion, the political leaders must make the ideology acceptable to the people. Of course, the ideology of welfare and socialism is easier to sell since it's based on the majority getting something for free. But when the people recognize that's only a temporary situation they will become more open to the suggestion that freedom offers more, once the bankruptcy of statism is acknowledged. Such a condition is becoming more apparent every day.
 내 의견에 의하면, 정치적인 지도자는 이데올로기를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물론, 복지와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는 다수의 사람들이 무료로 무언가를 얻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팔기 쉽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것들이 오직 일시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들은 국가주의의 파산이 명확해졌을 때 자유의 제안을 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한 조건은 시간이 갈수록 무르익고 있다. 
 
 Making an ideology palatable to the majority means the people must come to realize that their best interests are served by its acceptance. In the case of freedom, the consensus of the people must be that self-reliance, free markets, private property, sound money, and enforceable contracts are indispensable to prosperity, peace, and happiness.
 이데올로기를 대다수의 입맛에 맛게 가공하는 일은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의 경우, 사람들의 합의는 자력 갱생, 자유로운 시장, 사유 재산, 건전 통화, 그리고 계약을 이행하는 것이 부와 평화, 행복에 필수적이라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Central economic planning and false promises must be rejected. Some, on principle, will always reject the temptation to use government power to enhance their own position; others will reject it when it's clear that the prosperity promised, based on lies, fraud, and force, can only be temporarily provided. Transfer of wealth through government force is self-limited. The appearance of wealth by borrowing and inflation always leads to heartache and suffering. An opportunity has arrived for our "sound social and economic theories" to be made available and acceptable to the majority.
 중앙 경제 계획과 허위 계약은 거절되어야 한다. 원칙에 따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정부의 힘을 그들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사용하려는 유혹을 거부한다. 다른 이들은 거짓말과 사기, 힘에 근거한 번영의 약속이 오직 일시적으로만 제공될 수 있다는 것이 명확해졌을 때에만 그렇게 할 것이다.  정부의 힘을 통한 재산의 이전은 본질적으로 제약되어 있다.  빌리는 일과 인플레이션을 통한 부의 창출은 언제나 비탄과 고통을 유발한다.  우리의 건전한 사회와 건전한 경제학 이론을 대중이 받아들일 수 있는 유용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는 왔다.  
 
 Of all the Austrian economic greats of the twentieth century, I got to know Murray Rothbard the best. During my first tour of duty in Congress(1976 - 1984), while Lew Rockwell, founder of the Mises Institute, was serving as my chief of staff, we contacted Murray and invited him to Washington in 1979 for a visit. On his first trip, as he watched our office in action, I recall him saying he was amazed that a member of Congress actually made a determined effort to understand the details of each piece of legislation in the context of the Constitution. I recall his surprise when he found out I had read his essay "Gold and Fluctuating Fiat Exchange Rates." From this early association, he and Lew Rockwell went on to participate in many projects, the most important one being the establishment of the Mises Institute.
 20 세기의 모든 오스트리아 경제학의 거장 중에서 나는 머리 로스바드를 가장 잘 알고 있다.  국회에서의 나의 첫 활동기 (1976 - 1984) 동안, 미제스협회(Ludwig von Mises Institute)의 창설자 류 록웰이 나의 수석 보좌관으로 일하던 시기에, 우리는 머리를 만났고 1979 년에 그를 워싱턴으로 초대했다.  나는 그가 첫 번째 여행에서 우리의 활발한 사무실을 보았을 때, 국회의 일원이 실제로 각각의 법률을 헌법의 맥락에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내가 그의 에세이 "금과 변동하는 지폐의 환율" 을 읽는 것을 보고 그가 놀랐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 이른 교제로부터, 그와 류 록웰은 많은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제스협회의 창설이었다.  
 
 Murray was a good teacher, and I have frequently said that his book America's Great Depression was a real eye-opener for me, as was his classic What Has Government Done to Our Money. Having been raised in a Republican home, I was taught to believe Hoover's failure was a result of noncooperation by the Democrats in Congress. Murray thoroughly rebutted that notion with his explanation of how Hoover and FDR endorsed the same flawed policies of economic intervention and both were responsible for prolonging the Depression, which was precipitated by the seriously flawed monetary policy of the Federal Reserve in the 1920s.
 머리는 좋은 스승이었다.  그리고 나는 종종 그의 책 America's Great Depression 는 그의 고전 What Has Government Done to Our Money 와 함께 나를 일깨운 것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공화주의자의 가정에서 자란 나는 후버의 실패가 국회에 있는 민주당원들의 비협조 때문이었다고 배웠다.  그는 어떻게 후버와 FDR 이 경제에 간섭하는 잘못된 정책에 서명했는지 설명해 주었고 둘 모두가 1920 년대의 연방 준비 제도의 잘못된 정책이 촉발한 대공황을 장기화시키는 데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함으로써 철저히 그 주장을 반박했다.  
 
 If there's one book that the Washington establishment should read now, it's Rothbard's book America's Great Depression. In this book, he demonstrates that it was the Fed that created the late-1920s boom that led to bust, and Hoover's interventions that prolonged the Great Depression. (Murray, interestingly, was on my congressional staff during the time that the Gold Commission was meeting in 1981.)
 만약 지금 워싱턴의 수뇌부가 읽어야 하는 책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로스바드의 책 America's Great Depression 일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1920 년대의 붐을 만들고 그것을 터뜨린 것이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이며, 그것을 길게 연장시킨 것이 후버의 경제 간섭이라는 것을 실제로 보여 주었다.  (흥미롭게도, 머리는 금 위원회가 미팅을 가졌던 1981년 동안 나의 간부였다.) 
 
 Murray, along with businessman Burt Blumert and Lew Rockwell, influenced my decision to run as the Libertarian candidate for President in1988. That project, like all political projects, was filled with frustrations and shortcomings. Nevertheless, we all considered it a worthwhile effort in building the case for liberty. Obviously, the reception for the message in 1988 was subdued compared to the enthusiastic reception we got in the2008 race. Conditions have greatly changed. But the Republican versus the Libertarian approach was also a factor, given monopoly control of the electoral process. Today, the field is much more fertile for our ideas. Many seeds have been planted over these past two decades, and the effort is now bearing fruit.
 머리는, 비즈니스맨 버트 블루머트(Burt Blumert), 류 록웰과 함께 1988 년 대통령 선거에 자유주의자 후보로 출마하려는 나의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  그 프로젝트는, 다른 모든 정치적 프로젝트들처럼, 좌절과 부족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그것을 자유를 위한 운동을 건설하는 가치있는 노력이라고 간주했다.  분명히, 1988 년에 그 메세지가 받은 환영은 우리가 2008 년에 받은 환영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었다.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 대 공화주의자라는 접근 방법은 또한 독점 회사들이 선거 과정을 컨트롤하게 한 요인이었다.  오늘, 주변의 환경은 우리의 생각을 위해서는 훨씬 더 비옥하다. 지난 20 년 간 많은 씨앗이 심어졌다.  그리고 그 노력은 이제 열매를 맺고 있다.  
 
 Shortly before Murray died on January 7, 1995, I called him to tell him of my plans to run for Congress once again in the 1996 election. He was extremely excited and very encouraging. Unlike Leonard Read, Murray loved politics, Republican or Libertarian, or whatever he found of interest at any particular time. He got into the minutia of internecine activities that were beyond my interest. He always knew all the players and their perceived intentions and philosophical motivations. He played politics in the 1992 Republican primary in support of Pat Buchanan in a coalition of sorts, when Pat opposed the first war on Iraq and George H. W. Bush's tax increases.
 1995 년 1 월 7 일에 머리가 죽기 전에, 나는 1996 년 하원 선거에 다시 한번 출마하려는 계획에 대해서 말해 주기 위해 그를 불렀다.  그는 매우 흥분했고 많이 나를 격려해 주었다.  레너드 리드와 달리 머리는 자유주의든 공화주의든 또는 그가 관심을 가진 무엇에 대해서든 간에 늘 정치를 좋아했다.  그는 나 이상으로 정치권의 사소한 충돌 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항상 모든 인물과 그들의 목적, 철학적인 동기를 알고 있었다. 그는 1992 년 공화당 프라이머리에서 팻 뷰캐넌(Pat Buchanan)이 이라크에 대한 전쟁과 조지 하워드 부시(George H. W. Bush)의 세금 인상에 반대했을 때 팻을 일종의 연합군으로써 지원했다.  
 
 One thing I am certain of - if Murray could have been with us during the presidential primary in 2008, he would have had a lot to say about it and fun saying it. He would have been very excited. His natural tendency to be optimistic would have been enhanced. He would have loved every minute of it. He would have pushed the "revolution," especially since he contributed so much to preparing for it.
 내가 확신하는 한 가지는 - 만약 머리가 2008 년 대통령 선거에 우리와 함께 있었다면, 그는 그것에 대해 할 말이 많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매우 흥분했을 것이다. 그의 타고난 낙천성은 강화되었을 것이다. 그는 그 모든 시간을 좋아할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그것을 준비하는 데 많은 것을 공헌했으므로, "혁명" 을 밀어붙였을 것이다.  
 
 I can just imagine how enthralled he would have been to see college kids burning Federal Reserve notes. He would have led the chant we heard at so many rallies: "End the Fed! End the Fed!"
 나는 그가 대학생들이 연방 준비 은행권을 태우고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얼마나 매혹될지 상상만 해볼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우리가 매우 많은 거리에서 들었던 구호를 이끌었을 것이다: "연방 준비 제도를 끝내라! 연방 준비 제도를 끝내라!" 
 
 Even after the presidential campaign, the momentum has generated an interest in a serious movement to expose the Fed for the purposes of ending it, and Murray would be pleased. His intellectual effort would have been vindicated. Ideas were being translated into a serious effort to bring about a major political and economic change. His books, and especially his smaller booklets designed for broader distribution, on why the Fed must be ended and a 100 percent gold standard be required, have served us well. And they will continue to do so. His books What Has Government Done to Our Money? The Case for a 100 Percent Gold Dollar, and The Case Against the Fed have been invaluable assets in educating the general public.
 심지어 대통령 선거 운동이 끝난 뒤에도, 그 추진력은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를 폭로하려는 진지한 움직임을 이끌어 냈다.  머리는 기뻐했을 것이다.  그의 지적인 노력은 정당성이 입증될 것이었다. 아이디어는 정치권과 경제의 주요한 변화를 위한 노력으로 변환되고 있었다.  그의 책, 특히 왜 연방 준비 제도를 끝내야 하며 100 퍼센트의 금 본위제가 필요한지에 대한 그의 널리 익혀지기 위해 디자인된 작은 소책자는 우리를 잘 보조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하기를 계속할 것이다.  그의 책 What Has Government Done to Our Money? The Case for a 100 Percent Gold Dollar 와 The Case Against the Fed 는 대중을 교육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산이 되어 왔다.  
 
 Murray told a lot of stories about his time in the Ayn Rand "cult" and his association with Greenspan. Greenspan did acknowledge to me in private conversation his acquaintance with Murray. But think of the different outcomes. Both started as followers of Ayn Rand. Neither became an objectivist. Greenspan went the wrong way. Rothbard went the right way, always perfecting the truth regarding money and the Federal Reserve.
 머리는 에인 랜드(Ayn Rand) "문화" 속에서 보낸 그의 시간과 그린스펀과의 교제에 대해 많은 것을 말했다.  그린스펀은 사적 대화에서 그가 머리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의 다른 결과에 대해 생각해 보라. 양쪽 모두는 에인 랜드의 추종자로 시작했다. 둘 중 어느 쪽도 객관주의자가 되지는 않았다. 그린스펀은 잘못된 쪽으로 갔다. 로스바드는 돈과 연방 준비 제도를 다루는 일에 대해서 항상 진리를 완성하면서 올바른 방향으로 갔다. 
 
 Greenspan became a monetary tyrant who sowed the seeds of the greatest financial bubble in all of history.
 그린스펀은 역사상 최악의 금융 거품에 씨를 뿌린 화폐의 폭군이 되었다.  
 
 During this period of searching for the answers about money and Austrian economics, I also met Henry Hazlitt, who was a friend of Mises's, a board member of FEE, and a close associate of Leonard Read's. Like so many others looking for answers, I read his famous Economics in One Lesson. Mr. Hazlitt, shortly after the 1944 Bretton Woods Agreement was signed, predicted it would not work, and he lived well past the time to see its breakdown in 1971. Like many Austrian economists, he lived to an old age (ninety-eight); he died in 1993. All his books, of which there are many, are worth reading.
 돈과 오스트리아 경제학에 대한 답을 찾아다니던 기간에 나는 또한 미제스의 친구이자 FEE 의 멤버였고  레너드 리드의 동료였던 헨리 헤즈리트를 만났다.  답을 찾고 있던 많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의 유명한 Economics in One Lesson 를 읽었다.  헤즈리트 씨는, 1944 년 브레튼우즈 협정이 체결된 직후에 그것이 작동하지 않을 거라고 예견했다.  그리고 그는 1971 년 그것이 붕괴될 때까지 살아 있었다.  많은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와 같이, 그는 노년(98)까지 살았다. 그는 1993년에 죽었다. 그의 모든 책은 읽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Hazlitt was instrumental in securing a position at New York University for Mises. He had befriended Mises on his arrival to the United States after Mises escaped from Europe as World War II erupted. Although he was for years known as a journalist for Newsweek , the New York Times, and the Wall Street Journal , Hazlitt was in reality a philosopher and economist.
 헤즈리트는 미제스가 뉴욕 대학교에서 위치를 얻어내는 것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는 미제스가 2 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가 유럽을 피해 미국에 온 이후 미제스와 친구가 되었다. 그는 몇 년 동안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 뉴스위크(Newsweek), 월 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의 저널리스트로 알려져 있었지만, 헤즈리트는 실제로는 철학자였고 경제학자였다.  
 
 His greatest compliment to me was after Leonard Read's death in 1983; he called and asked if I might consider becoming president of FEE. Whether anyone else on the FEE board shared this thought, I don't know, but it was something I never seriously considered, simply because I had chosen a different educational path.
 나에 대한 그의 최대의 찬사는 레너드 리드가 1983 년에 죽은 이후에 있었다.  그는 내게 FEE 의 회장이 되는 것이 어떻냐고 권유했다.  FEE 회원 중 다른 누가 이 생각을 공유했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다른 교육적인 길을 골랐기 때문에 진지하게 고려해보지 않은 것이었다. 
 
 Another interesting tidbit of history was that Henry Hazlitt introduced Ayn Rand to all the free-market scholars in New York, which included his close friends Leonard Read and Mises.
 역사의 또 다른 재미있는 부분은 헨리 헤즈리트가 에인 랜드를 레너드 리드와 미제스를 포함한 뉴욕의 모든 자유 거래 시장 학자들에게 소개한 것이었다.  
 
 The period between the Depression and the end of Bretton Woods in 1971 was a time of much activity by many very smart, libertarian, and old right constitutionalists and noninterventionists. They lamented the destruction of the Republic, but their writings laid the foundation of the emerging freedom movement that became so energized during the Republican primary elections of 2008.
 대공황에서부터 1971 년에 브레튼우즈 체제가 끝나기 전까지의 기간은 많은 현명한 사람들, 자유주의자들, 헌법주의자들, 불개입주의자들이 활동한 시대였다.  그들은 공화국의 파괴를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집필은 2008 년 공화당 경선 동안 활발히 활동한 자유를 추구하는 새로운 운동들을 낳았다.  
 
 And there were many others I read that kept the spirit of the Republic alive. Some were much more interested in monetary policy, while others talked about personal liberty and foreign policy as well as economic liberty. Having read the books of John T. Flynn, Isabel Patterson, Rose Wilder Lane, Garet Garrett, Ayn Rand, Richard Weaver, Albert J. Nock, H. L. Mencken, and Frank Chodorov, I was not only influenced but convinced that a philosophy that embraced personal liberty, private property, and sound money was the only political philosophy worth championing.
 그리고 내가 읽어본 공화국의 정신을 지키고 있는 책들이 많이 있다.  어떤 것들은 금융 정책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이 있었고, 다른 것들은 경제적 자유 외에도 개인의 자유와 대회 정책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존 플린(John T. Flynn), 이사벨 패터슨(Isabel Patterson), 로즈 와일더 레인(Rose Wilder Lane), 가렛 가렛트(Garet Garrett), 에인 랜드, 리차드 위버(Richard Weaver), 알버트 녹(Albert J. Nock), 멘켄(H. L. Mencken), 그리고 프랭크 쵸도로프(Frank Chodorov)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단순히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개인의 자유, 사유 재산, 건전 통화를 품고 있는 철학이야말로 승리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정치 철학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To understand the need for sound money and no central bank, one must fully understand the principles of liberty. There were also several members of Congress during this period who held their ground and voted in keeping with the Constitution: Dr. Smith of Ohio, Howard Buffett, and H. R. Gross.
 중앙 은행의 제거와 건전 통화의 필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자유의 원칙을 완전히 이해해야만 한다.  이 기간에는 그들의 기반을 유지하고 헌법을 지키기 위해 투표한 몇 명의 국회 의원들도 있었다: 오하이오의 Dr. 스미스(Smith), 하워드 버핏(Howard Buffett), 그리고 그로스(H. R. Gross).  
 
 We all owe a great deal of gratitude to the men and women who did such a superb job of presenting the moral case for liberty and refuting all the monstrous lies, ignorance, and arrogance of those who spent their lives promoting authoritarianism, statism, and universal use of aggressive force.
 우리는 자유의 도덕적인 가치를 지킨, 그리고 자기 인생을 권위주의와 국가주의 및 공격적인 권력의 세계적인 사용을 촉진하는 데 낭비한 이들의 허위와 무지와 거만을 극복해낸 모든 남성들과 여성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Although Ayn Rand never spoke kindly of libertarians and I never contemplated becoming a supporter of objectivism as a total philosophy, I did read all her novels and received her objectivist newsletter essentially the whole time it was published. She challenged many of my beliefs that I had taken for granted and forced me to understand and defend them better. However, she never convinced me of her definition and application of altruism. Equating voluntary Christian charities with Communism made no sense to me. But she also built up my excitement for championing freedom. I have in my library a copy of the original 1957 hardbound edition of her huge Atlas Shrugged. The price listed on the cover flap is $6.95.There's no doubt she influenced a lot of people over the decades and forced them to reassess their premises, and most came away being more devoted to liberty.
 에인 랜드는 자유주의자에 대해 절대로 친절하게 말하지 않았고 나는 전체 철학으로써 객관주의의 지지자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의 모든 소설을 읽었고 그녀의 객관주의적인 뉴스 레터를 발표될 때마다 기본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내가 당연하게 생각한 많은 것들에 도전하게 했고 내가 그것들을 더 잘 이해하고 잘 방어하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타주의에 대한 그녀의 정의에 대해서는 나를 결코 납득시키지 못했다.  자발적인 기독교의 자선이 공산주의와 같다는 주장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 또한 자유를 옹호하는 일에 대한 나의 관심을 촉진시켜 주었다.  나는 내 도서관에 그녀의 소설 아틀라스의 1957 년 판본을 가지고 있다.  커버 날개에 적힌 가격은 $6.95 였다.  그녀가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들의 전제를 재평가하도록 했으며, 대부분은 더 많은 자유를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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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달러와 금 관련 경제소식들
글쓴이 : 스패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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