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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미국과 중국 사이의 금융 냉전 (Financial Cold War) (vivitelaeti)

wisstark 2016. 3. 2. 07:32

미국과 중국 사이의 금융 냉전 (Financial Cold War)

[1] 이전 글에서 중국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중국의 정책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중국이

 미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카드 두 장은 (i) 미 국채 대량 투매와 (ii) 금 보유량 공개입니다. 이전 

글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중국이 미 국채를 투매하면, 국채 가격이 폭락하면서 국채 금리가 급등하여 

미국 경제가 무너지게 됩니다. 미국 경제가 무너지면, 세계경제 전체가 무너지게 되고, 여기에서 중국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국채 대량 투매라는 수단은 중국이 미국과 공멸(共滅)하겠다고 결정하지 않는 한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일종의 미국에 대한 전면적인 선전 포고와 비슷하기 때문에, 금융 핵폭탄(financial

 nuclear bomb)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중국이 금 보유량을 공개하는 것도 국채 대량 투매만큼 큰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그에 버금가는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중국의 금 보유량이 적을 때는 금 보유량을 공개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금 보유량은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게 관련 전문가들의 대체저인 의견입니다.

[3] 중국이 실제 금 보유량을 공개하면, 시장 참여자들은 실제 시장에서 거래되는 물량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금 매입량을 늘리게 됩니다. 따라서 금 가격은 순식간에 치솟게 됩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달러 

가치가 크게 떨어지게 됩니다. 그에 따라, 국제 자본이 중국 위안화로 쏠리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달러 가치가 떨어지고 미국의 물가가 본격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하면 미국은 금리를 인상해야 하는 상황으로 

가게 됩니다. 미국이 금리를 인상하면 중국 경제 또한 충격이 불가피해집니다. 따라서 중국이 금 보유량을 

공개하는 것은 미 국채를 대량 투매하는 것만큼 직접적인 영향은 주지 않지만, 결국엔 현재의 경제 상황을 

무너뜨릴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국채 대량 투매 못지 않은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수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미 국채를 대량 투매하든, 금 보유량을 공개하든, 두 가지 모두 미국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뿐 아니라, 중국 자체도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이 두 가지 카드는 세계 경제 전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예전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를 가지고 냉전(Cold War)을 벌였지만 끝까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듯이, 이번에도 미국과 중국이 금융시장에서 핵폭탄급 수단을 가지고 경쟁을 하겠지만, 양국

 모두 무너질 만큰 파급력이 워낙에 크기 때문에 그 수단을 쉽게 사용하지는 못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5] 그렇다면, 중국은 미 국채를 얼마나 보유하고 있고, 실물 금은 또 얼마나 보유하고 있을까요. 국채 

보유액은 매달 미 재무부(Department of the Treasury)가 발표하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습니다. 2014년 

12월 현재 중국의 미 국채 보유액은 1조 2,443억 달러로 나타나 있습니다. 최고 많이 보유할 때와 비교하면,

 700억 달러 이상 감소한 규모입니다. 최근 수년 간 계속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6] 문제는 중국의 금 보유량입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중국은 금 보유를 크게 늘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2006년 들어 갑자기 금 보유량을 600톤으로 늘렸다고 공개를 했습니다. 이후 금 보유량을 공개하지 

않다가, 2009년 4월에, 중국 관영 통신 신화사(新華社)가 당시 국가외환관리국 국장의 말을 인용해 금 보유량을

 간접적으로 공개했습니다. 이때 공개한 중국의 금 보유량이 1,054톤이었습니다. 이때 국제 금값이 크게 

올랐습니다. 따라서 중국이 대폭 늘린 금 보유량을 공개하면 국제 금값은 이번에도 크게 오를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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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009년 4월 공개한 이후 중국은 금 보유량에 대해서는 추가로 공개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공개를 한 지 벌써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6년이란 기간 동안 중국은 과연 얼마나 많은 금을 

늘려왔을까요. 중국의 금 보유량 공개가 미치는 영향이 워낙에 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중국은 현재까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습니다.

[8] 중국이 공식적으로 금 보유량을 발표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시장에서 나도는 여러 가지 정보와 자료를

 바탕으로 중국의 금 보유량을 추측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다음의 기사를 보면, 중국이 금 보유량을 본격적으로

 늘리기 시작한 것은 2008년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이전부터인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의 금 보유량은

 2002년 12월 이후 600톤으로 큰 변화가 없었지만,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발발하기 전인 2006년쯤 경부터 

금 매입을 늘리려는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때의 움직임은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만들기 위한 전략이라기

보다는, 단순히 외환 보유액의 다변화 차원에서 움직인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중국 주요 인사들의 언급을 보면,

 전체 외환보유액 가운데 금 보유량을 적절히 늘릴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일부에서는 장기적으로 

금 보유량을 2,500톤까지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세계 최대 외환 보유국 중국 금 사재기 나선다 (세계일보, 2006. 5. 23)

[9] 중국이 금 보유량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2009년입니다. 그해 4월 23일에 중국이 1,054톤의 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외환보유액을 관리하는 국유자산감독관리

위원회의 한 인사는, 앞으로 중국은 3~5년 내에 금 보유량을 6,000톤으로 늘리고, 8~10년 내에는 

10,000톤으로 늘려야 한다는 주장까지 합니다.

中 “금 보유량 5년내 6,000톤으로” (서울경제, 2009. 12. 1)

[10] 하지만 그 이후 중국은 자국의 금 보유량에 대해서는 더 이상 공개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2014년 3~4월 사이에 중국의 금 생산량과 소비량 사이에 400톤 이상의 차이가 난다는 주장이 잇따라 

제기됩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2013년 중국의 금 공급량은 홍콩을 통해 수입한 1,158.2톤과 자체 생산한

 428.2톤을 합해 1,585.4톤입니다.

  • 공급량: 1,586.4톤 (2013년 기준)

               = 1,158.2톤(수입) + 428.2톤(생산)

[11] 하지만 중국이 금 소비량을 보면, 장신구, 금괴, 금화, 공업용 등을 모두 합해 1,176.4톤밖에 되지 않습니다.

  • 소비량: 1,176.4톤 (2013년 기준)

              = 716.5톤(장신구) + 375.73톤(금괴) + 25.03톤(금화) 

                 + 48.74톤(공업용) + 10.4톤(기타) 

[12] 따라서 단순히 공급량과 소비량만을 비교해보면, 무려 410톤의 물량이 비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우리나라 한국은행의 금 보유량은 104.4톤입니다.) 따라서 시장에서는 이 물량이 중국의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의 금고 속으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中 정부 통계서 사라진 황금 410톤… 어디로? (헤럴드경제, 2014. 3.9)

위의 자료를 근거로 계산하면, 중국은 매년 적게는 300톤, 많게는 500톤 이상의 금을 추가적으로 늘렸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금 보유량을 공개한 지 6년이 지났다는 점을 고려하여 추산해보면, 중국은

 2009년 이후 대략 1,800톤에서 3,000톤 이상의 금을 추가적으로 늘리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13] 그 사이 국제 금값은 낮게 유지되어 왔습니다. 중국으로써는 금 보유량을 늘리는 절호의 기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으로써도 굳이 금 보유량을 공개해 금값이 상승하도록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중국은 

금을 대량으로 매입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며 금 매입에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기까지 합니다. 한 마디로, 

중국은 겉으로는 금 매입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면서도, 뒤로는 저가로 대량의 금을 매입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인민은행, 금 대량 매입에 부정적 입장 (연합뉴스, 2013. 3. 14)

[14] 최근 6년 동안 모은 금에, 2009년에 발표한 물량까지 합하면, 중국의 금 보유량은 적게는 3,000톤에서 

많게는 4,500톤 이상이 될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인 추측입니다. 수치상으로 나타나지 않는 물량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마도 실제 인민은행의 금 보유량은 5,000톤이 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따라서 2009년

 당시 앞으로 3~5년 내에 금 보유량을 6,000톤으로 늘리겠다고 했던 주장을 상당히 충실하게 진행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만간 미국이 보유하고 있다고 알려진 8,133.5톤 수준까지 늘어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15] 따라서 중국이 실제 금 보유량을 대외에 공개하면, 시장은 시장에 매물로 나와 있는 실물 금의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테고, 그렇게 되면 금 가격은 폭등할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금 가격이 급등하게 

되면, 미 달러의 가치는 크게 떨어지게 됩니다. 더욱이 국제자본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급격하게 이전하게 되면

 달러 가치는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16] 이미 상당수의 금 전문가들은 서방의 중앙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던 금의 상당량이 동양, 그 중에서도 중국,

 인도, 러시아 등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중국이 실제 5,000톤 이상의 금을 보유하고 있다면, 

미국이나 영국의 금 보유량은 미미한 수준까지 떨어지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봅니다. 2008년 이후 미국이

 양적완화를 하면서 4조 달러 이상의 화폐를 시장에 공급했음에도 금 가격은 오히려 하락했습니다. 이것은 각국 

중앙은행이 가지고 있던 실물 금을 임대 형태로 시장에 공급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앙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는 금을 활용하여 금 가격을 낮추었을 가능성을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7] 따라서 중국이 금 보유량을 공개했을 때, 그 양이 일반이 기대했던 것보다 많은 물량이라면, 이것은 서방

 국가의 금이 바닥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금 가격은 지금까지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수준까지 치솟을 것으로 보입니다.

<세상의 모든 다큐: 비밀스러운 금의 세계>를 보면, 금이 서방 중앙은행에서 사라져가고 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다큐의 34분 부분). 아마도 중국이 본격적으로 금 보유량을 늘리면서 이런 추세는 더욱 강화되었을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18] 하지만 금 보유량을 공개하는 것이 중국의 미국에 대한 일방적인 공격이 될 수는 없습니다. 금 보유량을 

공개하면 중국 또한 적잖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금 보유량을 공개하는 순간 위안화 가치는 

폭등하게 됩니다. 그에 따라, 중국의 수출은 급감하게 되고, 중국은 지금보다 더 극심한 경제 침체에 빠져들게

 됩니다. 전세계의 공장 역할을 했던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이 급감함에 따라 중국의 저렴한 상품을 수입하여

 사용하던 많은 국가들이 생필품 부족과 그에 따른 높은 인플레이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전세계적으로 동시에 금리가 인상되게 됩니다. 중국이 금 보유량을 공개하는 것도 일종의 금융 핵폭탄

(financial nuclear bomb)과 같은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19] 따라서 미 국채를 대량으로 매각하거나 금 보유량을 공개하는 것과 같은 금융 핵무기를 중국이 선뜻 

사용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예전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를 가지고 냉전을 치렀지만 끝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냉전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번 중국과 미국 사이의 금융 냉전 또한 금융 핵무기들을 사용하지 않은 채 

다른 방식으로 끝날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 보입니다. 미국과 중국이 어떤 식으로 대처해나가는가에 따라,

 두 번째 쓰나미의 크기도 결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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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과 조선,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

[1]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은 유럽에서 나폴레옹이 패한 이후, 1813년부터 1907년까지 거의 

100년간에 걸쳐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고 영국이 전세계를 대상으로 추진했던 방어전략을 이야기합니다. 

이 전략의 일환으로 아시아에서 일본이 영국을 대신하여 러시아를 막는 역할을 맡게 되고, 그 과정에서 일본의

 대륙 진출 욕구와 맞물리면서 조선이 힘없이 일본의 손에 떨어지는 비극이 나타나게 됩니다. 당시 일본도 

영국이 주도하던 그레이트 게임에서 하나의 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힘도 없던 조선이라는

 나라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조선은 국제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고,

 그로 인해 대처도 아주 미숙했습니다.

뜨거운 냉기가 흐르는 중앙아시아의 눈물, ‘그레이트 게임’ (오마이뉴스, 2008. 0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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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금 상황이 100여년 전 영국과 러시아가 벌였던 그레이트 게임과 유사한 상황이 다시 벌어지는 듯하여 

소개하고자 합니다. 당시에는 영국과 러시아가 세계 각국을 말로 삼아 게임을 벌였다면, 지금은 미국과 중국이

 인근 나라들을 말로 삼아 게임을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100여년 전에도 국제 정세가 조선이라는 

나라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었듯이, 지금도 한국이라는 나라의 의지와 무관하게

 한국이라는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3]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사라진 후, 유럽에서는 영국과 러시아가 강국으로 떠오릅니다. 초기에는 영국도 

러시아의 남하에 대해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영국이 1858년에 인도를 합병하면서부터 이야기는 

급변하게 됩니다. 당시 영국은 인도를 “왕관 속의 보석” (the Jewel in the Crown)이라고 묘사할 만큼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왕관이라 함은 당연히 대영제국 황제의 왕관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영국은

 인도의 중요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이 인도를 이렇게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인도가 영국 부(富)의 원천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해 생산성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면직물 산업이 번창하던 시기였는데, 인도는 면직물 제조에 필수적인 목화의 대량 공급처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영국은 어떤 경우에도 인도를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4] 그런데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추진하면서 인도 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러시아는 북쪽에 

위치한 나라로, 겨울철 얼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에 대한 욕구가 매우 강했습니다. 1800년대 후반 강대국은 

강력한 해군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이 대표적이었습니다. 당시 강대국의 기본 조건은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부동항의 확보가 필수적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대륙에서는 

강대국으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바다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하든 해군력을 확대하고 싶어 

했던 러시아는 부동항을 확보하려고 했고, 이러한 의도는 남하정책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물론, 러시아가 해군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북해의 발트 함대(Baltic Fleet)가 있었고, 극동지역에 극동함대

(Far East Fleet)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세계 경제는 인도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러시아가 

보유하고 있던 두 개의 함대는 모두 경제 중심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5] 러시아의 부동항 확보 전략의 첫 번째 목표는 흑해였습니다. 당시 오토만 제국(the Ottoman Empire)의

 힘이 약해지던 상황이었는데, 러시아는 그리스 정교를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1853년 오토만 제국을 

침범합니다. 이 전쟁이 바로 나이팅게일이 크게 활약했던 ‘크림전쟁’(the Crimean War)입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 전쟁에서 패하게 됩니다. 그러자 러시아는 인도 쪽으로 방향을 틀어,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하나씩 

침략하게 됩니다. 그리고 1885년 3월 30일 인도와 러시아 사이에 있던 아프카니스탄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파키스탄만 점령당하면 바로 인도가 위험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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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러시아의 아프카니스탄 점령 소식은 4월 7일이 영국에 전해집니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영국은 엄청난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러시아의 아프카니스탄 점령을, 인도를 공격하기 위한 전초 기지 확보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영국 증시에서 주가가 연일 폭락하고, 영국 정부는 준전시상태를 선포하면서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준비하고, 인도에서도 병력이 소집되면서 실질적인 전쟁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7] 영국 해군은 곧바로 러시아 함대의 동향을 면밀히 감시함과 동시에, 조선의 거문도를 4월 15일에 점령하게

 됩니다. 영국이 왜 갑자기 거문도를 점령했는가 하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884-5년 사이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됐던 ‘조·러 비밀협약’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명성황후는 청나라가 대원군을 

다시 돌려보내려고 하자, 이를 견제할 목적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입니다. 대신, 러시아는 거문도를 러시아 해군의

 석탄보급기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당시 해군은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절한 위치에 석탄 보급기지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거문도는 지정학적으로 석탄보급기지를 만들기에

 아주 적당한 위치에 있었고, 거문도가 가진 이런 지정학적 중요도를 잘 알고 있던 러시아가 거문도의 사용 

허가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던 영국은, 러시아가 아프카니스탄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바로 함정을 보내 거문도를 점령했던 것입니다.

[8] 하지만 아프카니스탄을 두고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벌어지던 긴장은 1887년 양국이 외교적으로 

아프카니스탄 국경을 설정하는 데 합의함으로써 해소되게 됩니다. 그리고 영국은 같은 해 2월 15일 거문도에서도

 철수하게 됩니다.

[9] 흑해와 중앙아시아를 통한 남하정책이 영국에 의해 막히자, 러시아는 이제 극동 아시아지역을 통한

 남하정책을 추진하게 되는데, 그 대상이 된 지역이 바로 만주(Manchuria)와 한반도입니다. 아시아를 통한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1888년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개통으로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개통은, 영국이 지배하고 있는 바다를 통하지 않고 아시아로 물자와 장비를 실어 나를 수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에게는 의미가 아주 큰 사건이었습니다.

[10] 그 사이 일본은 당시 국제사회의 예상과 달리,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에 걸쳐 일어난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일본은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중국의 요동반도를 확보하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의 대륙 진출을 눈 뜨고 가만히 지켜볼 러시아가 아니었습니다.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설득해, 요동반도를 다시 중국에 돌려줄 것을 일본에 요구합니다. 러시아 하나로도 대처하기가 벅찬데 

프랑스와 독일이 연합해 요구하자, 일본은 결국 5월 5일에 요동반도를 중국에 반환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를 

‘삼국간섭’이라고 합니다.

[11] 이 삼국간섭에서 러시아의 힘을 확인한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리고자 합니다. 하지만 일본이 이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리 없습니다. 결국 일본은 조선 측 여러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을 저지릅니다. 바로 을미사변입니다. 국내의 시각으로 보면, 한 나라의 황후를 암살한 말도 

안 되는 사건이지만, 국제적인 시각으로 보면,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영국의 커다란 게임 속에서 파생된 

작은 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조선측 협조자 가운데, 우범선(禹範善)이라는 고위 관료가 있었는데,

 일본으로 피신했다가 후에 대한제국 정부의 지시를 받은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당합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인 우장춘 박사는 1945년 광복과 더불어 국내에 들어와 국내 육종에 지대한 공헌을 합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죠.)

[12] 흑해와 중앙아시아를 통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영국은, 아시아에서의 남하도 막아낼

 방법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영국이 찾아낸 방안은 바로 일본을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1902년 1월 30일, 

영국은 일본과 동맹협정을 맺습니다. 이 협정을 통해 당시로써는 최첨단 기술이었던 군함의 설계도와 건조방법

 등도 일본에 넘깁니다. 그리고 일본을 움직여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본격적으로 막기 시작합니다. 당시 러시아

 남하정책의 핵심은 만주와 한반도를 모두 차지하는 것이었고, 일본의 대륙 진출 정책의 핵심 역시 한반도와

 만주를 확보하는 방안이었기 때문에, 일본과 러시아는 서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13] 그러자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각종 제안이 오갑니다. 대동강과 원산을 기점으로 하는

 북위 39도 선을 경계로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를 분할해 점령하자는 제안이 나오기도 하고, 만주는 러시아가

 점령하고 한반도는 일본이 점령하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01년 러시아는 한반도를 

중립화하자는 제안을 내놓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은 만주도 중립화하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던 중 1903년 7월 러시아는 한반도에 대한 새로운 제안을 내놓습니다. 한반도의 39도선을 기준으로 

남쪽으로는 일본의 특수이익을 인정할 테니까, 그 대신 39도선 북쪽은 중립화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러시아의 제안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1904년 2월 4일 협상 중지를 선언합니다.

[14] 협상이 중단되자, 1904년 2월 4일 여순항(Port Arthur)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의 극동함대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은 바로 해군을 움직여 2월 8일 여순항 앞바다에서 전투를 벌여 러시아

 함대를 여순항 안으로 밀어 넣는 데 성공합니다. 러일 전쟁(Russo-Japan War)의 시작이었습니다. 일본은 

여순항을 봉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여순항 안으로 진입하는 데는 실패합니다. 그래서 찾아낸 대안이 육지를

 통해 여순항을 공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1904년 12월 5일 일본은 마침내

 육지의 요지를 차지하는 데 성공하고, 이후 바로 여순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의 극동함대를 격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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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he Japanese Surprise Attack They Didn’t Teach You In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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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904-1905 Russo-Japanese War>

[15] 당황한 러시아는 발트함대를 긴급 아시아로 파견합니다. 하지만 당시 석탄으로 함정을 움직이던 시기라

 함대가 장거리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원활한 석탄 보급이 필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수에즈 운하와 주요

 보급로를 영국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1904년 10월 14일에 발트해를 떠난 러시아 함대는 아프리카의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220일만에 아시아에 도착합니다. 프랑스 령이었던 인도차이나의 반퐁항에 일단 

정박하지만 이곳에서도 충분한 보급을 받지 못합니다. 중국의 여순항이 여전히 러시아의 손에 있었다면, 

여순항에서 부족한 석탄과 물품을 받으면 해결될 일이었지만, 여순항은 이미 일본의 손에 떨어진 뒤였습니다.

 따라서 대서양과 인도양을 거쳐 인도차이나에 도착한 러시아 함대가 갈 수 있는 곳은 블라디보스톡밖에 

없었습니다.

[16] 하지만 블라디보스톡을 가기 위해서는 일본을 지나쳐 가야 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세 가지

 경로를 두고 고민하던 러시아함대는 가장 가까운 경로인 대한 해협과 쓰시마 해협을 통해 가는 방안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1905년 5월 17일 러시아함대는 반퐁항에서 대한해협을 향해 출발합니다. 하지만 러시아

 함대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하던 일본 함대는 5월 27일 새벽 대한해협에서 러시아함대를 발견하고는 추격에

 나섭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1시 55분, 마침내 일본 함대에 공격 명령이 떨어집니다. 연료 부족과 오랜 

항해에 지쳐있던 러시아함대는 일본함대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습습니다. 결국 일본은 국제사회의 

예측을 깨고, 당시 세계 최강이라 불리던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로써 러일전쟁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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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전쟁이 끝나자 영국 측 입장에서 간접적으로 일본 편에 섰던 미국이 협상 중재자로 나섭니다. 이 협상은 

1905년 9월 5일 루즈벨트 대통령의 주재로 뉴햄프셔 주의 포츠머스에서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 협상의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포츠머스 강화조약’(Treaty of Portsmouth)입니다. 이 협상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국제적으로 확실하게 보장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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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904-1905 Russo-Japanese War>

[18] 그리고 2년 뒤인 1907년 영러 협상(Anglo-Russian Entente)을 통해, 영국과 러시아가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 티베트에 걸친 중앙아시아의 세력 범위를 조약으로 확정하면서, 근 100여년을 끌어왔던 

그레이트 게임은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이를 통해,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성공적으로 막아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이런 영국의 전략을 충실히 이행해, 아시아에서의 러시아의 확장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영국 입장에서 보면, 일본도 결국은 그레이트 게임판 위의 하나의 말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19] 그렇다면 당시 조선의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고종은 미국이 끝까지 조선의 편을 들어줄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루즈벨트 대통령은 고종의 기대와 달리, 전혀 조선을 협상이나 보호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조선에 대한 루즈벨트 대통령의 시각은 1905년 John Hay 국무장관에게 한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인을 위해 일본 정책에 개입할 수 없다. 한국은 자신들의 영역 내에서  주먹 한 번 못 날렸다

.” (We cannot possibly interfere for the Koreans against Japan. They could not strike one blow

 in their own def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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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고종은 미국에 밀사를 보내 조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1905년 9월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도 고종은 극진히 대접을 해서 보냅니다.

대한제국에 온 미국 공주…서글픈 역사의 흔적 (SBS뉴스, 2016. 01. 04) 

하지만 아무 의미 없는 행동들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이라는 나라가, 그리고 고종과 정치인들이, 얼마나 국제 

정제에 어두웠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알았다고 하더라도 별다른 대책이 없었을 것이기는 합니다.

 아래 그림은 당시 국제사회가 바라보던 한반도 상황을 나타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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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후의 진행과정은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한일 합방 조약(韓日合邦条約)에 대한 서명이 이루어지고, 같은 달 29일에 해당 조약이 정식 

발효됩니다. 그리고 조선 혹은 대한제국이라 불리던 나라는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21] 이 시점에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크게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먼저, 그 동안

 우리나라의 경제발전, 특히 1970년대 이후의 경제 발전의 기반에는 새로운 라운드의 그레이트 게임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당시 공산주의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전 영국에 의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자 했던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은 이제 미국을 중심으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것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게임에서 한국이라는 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공산화된 북한보다 경제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고, 공산주의가 

일본으로 확대되는 것 또한 막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한국은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고, 

지금은 다른 개도국들 사이에서 경제발전의 모범 사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으려

 했던 두 번째 그레이트 게임(the Second Great Game)이 없었더라도, 과연 우리나라는 지금과 같은 빠른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22] 다음으로, 지금 다시 새로운 라운드, 즉 세 번째 그레이트 게임(the Third Great Game)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이번에도 막고자 하는 주체는 여전히 미국이지만, 그 대상은 공산주의에서 

중국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리고 과거 영국이 일본을 통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았듯이, 다시 미국은 일본을 

움직여 중국의 확장을 막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는 중심을 

못 잡고 갈팡질팡만 하고 있습니다.

[23] 지금까지의 글을 모두 읽으신 분들은 일본이 온갖 수모에도 불구하고 왜 끝까지 친미 국가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국제적인 큰 힘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고, 이 커다란 게임에서 

누구 편에 서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일본이 독자적인 힘의 주체가 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결국 어느 편엔가 서서 말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안보법 개정부터

 자위대의 역할 확대 등 최근의 일본 움직임을 보면, 이런 결정을 확실하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24] 첫 번째 그레이트 게임에서 한국은 희생양이 되었지만, 두 번째 그레이트 게임에서는 수혜자 입장에 

있었습니다. 이번 세 번째 그레이트 게임에서는 어떤 결과를 얻게 될까요. 희생양이 될까요, 아니면 수혜자가 

될까요… 분명한 것은 이번 그레이트 게임에서도 우리나라는 하나의 아주 작은 말에 불과할 뿐이라는 점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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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he Great Game>




출처 : 달러와 금 관련 경제소식들
글쓴이 : giseg07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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