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인간을 누가 창조하였는지. 어떻게 진화되었는지 궁금하겠지만 진리의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창조의 근원과 사후세계에 대해 알면 어쩌겠다는 것인가?
과거와 미래는 중요하지 않다. 또한 현재도 지나가는 것이다.
"금강경"에도 과거의 마음. 현재의 마음. 미래의 마음은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중생들의 몸과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이다. 부처의 몸과 마음이 되어야만 느낄 수 있는 심오한 문구이다.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려고 하면 점점 수궁으로 빠져들게 되고
지식과 학식으로 글을 남기게 되면 자신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인도의 성자 싯다르타는 자신의 체험과 경험을 바탕으로 수많은 방편과 비유를 들어가며
중생들을 안락한 피안의 땅으로 인도하였다. 그는 글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설명했던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붓다는 마하가섭에게 전통성을 물려주었고
가섭은 또 다른 제자에게 법을 물려주는 방법으로 보리달마에게 전해진다.
달마는 중국으로 건너와 혜가에게 수행법을 전하였으며
헤가는 승찬에게 승찬은 도신에게 도신은 홍인에게 홍인은 혜능에게 수행법을 전해준다.
이들이 전해준 法이 경전이었을까?
말이나 글로서 전할 수 없는 것이 바로 法이다.
인간의 몸과 마음에서 나타나는 神妙(신묘)한 것은 절대 글이나 말로 전할 수 없다.
자신이 직접 수행을 통해 체험하지 않으면 전할 수 없는 것이 法이다.
살아 있는 부처의 몸과 마음에 대해 과학적으로 또는 인체 구조학과 물리적으로 法을 조명해야한다.
과학장비나 인체구조학이 뒤떨어진 시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첨단 과학시대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의학이 발전하고 과학이 첨단이라고 해도 살아있는 생명체를 해부할 수는 없다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이 부처님의 몸과 마음에 대해 밝혀낼 수 없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과학자나 의학자들이 부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며. 부처가 된 사람이라도 의학이나 과학적인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과 맛을 보지도 못한 사람이 어떻게 맛을 전할 수 있겠으며 사과 맛은 보았으나 글을 모르니 어떻게 문자로 전할 수 있겠는가?
"修身悟道(수신오도)"는 인간이 잉태되어 중생으로 살다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되는 과정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밝혀낼 것이다.
왜 늙어 가는지?
왜 병들어 가는지?
마음이란 무엇인지?
마음과 몸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진리란 무엇인지에 대해 조명할 것이다.
모름지기 覺者(각자)는 인간의 몸과 마음에 대해 막힘이 없어야 한다.
각을 이룬 사람들의 말은 하나처럼 동일하다.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부처님들은 마음이 없다. 無心이다.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말을 하기에 언제 어디서 말을 하든 다르지 않은 것이다.
달마가 한 말이나. 혜가 대사가 한 말이나. 혜능 대사가 한 말이나. 모두 같은 말이며 한 사람이 한 말이다.
허공이 된 사람이기에 하나이다. 허공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한들 자신이 한 말을 모르겠는가?
위대한 성자 싯다르타는 자신이 가르쳐준 수행법을 등불 삼고(法燈明) 스스로를 등불삼아(自燈明) 용맹정진 하여 중생의 틀에서 벗어나 法身이 되라고 가르치셨다. 붇다가 열반에 드시면서
"나는 神이 아니므로 나를 믿지 말것이며 우상화 하지도 말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기셨다.
이러한 붇다의 말씀을 모르는 수행자는 없을것이다.
종교를 만든사람들은 유신론자들이며 유심론자들이다. 다시말해 마음이 있는 사람이다.
풀어서 말하면 아직 인간의 몸과 마음에 대해 깨달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래를 본 수행자는 절대 종교를 만들지 않는다.
말해보라! 어떤 부처님이 종교를 만들었는가를?
부처를 믿는다는 것은 부처님이 일러주신 수행법대로 수행을 하면 우리들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을 믿는 것이지. 기독교. 천주교.힌두교처럼 神을 우상화 하고.
모든 것이 신에 의해 우주가 움직이는 것이니 신을 믿는자만이 영생을 얻고.
신을 믿어야 천당에 가고. 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불에 떨어진다고 무지한 중생들을 끌어모으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부처님의 수행법을 전하는 분들은 자신이 먼저 부처가 된 후에 붇다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지도해야한다. 물론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오묘한 法를 설명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것이다.
그렇다고 法를 회손시켜서는 안된다. 오랜 수행으로 몸과 마음에 대해 깨달았다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경전을 연구하고 편찬하는 일은 학자들의 몫이지 수행자들의 몫은 아니다.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되는 것이 수행자의 몫이다. 물론 수행자라고해서 경전을 배우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8만 대장경이나. 5040권의 경전을 모두 가로 세로 줄줄 외운다고 부처가 아니지 않는가?
마음이 없는 사람을 부처라 하고 이를 무심론자라 한다.
무심론자는 종교를 만들지 않았다.
마음이 있는 사람을 유심론자라 하며 이를 다른 말로 중생들이라 한다.
종교를 만든 사람들은 모두 유심론자이다.
佛敎는 종교가 아니다. 부처가 되는 法를 가르치고 함께 수행하는 곳임을 잊지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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