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ISIL에 정당성을 주는가
2014년 10월 13일 | By: 신호철
2014108111714942734_8 (이 글을 쓴 수마야 간누쉬는 영국계 튀니지 작가로 중동 정치 전문가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이슬람국가(IS)로 불리는 단체를 지칭하면서 ISIS라는 용어를 써왔지만, 원저자의 표기에 따라 ISIL로 표기합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오스만튀르크의 패배로 끝난 뒤, 영국과 프랑스는 옛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영토 분할 문제를 위해 비밀 협정을 맺었습니다. 1916년 맺어진 이 협정은 양국 외교관 이름을 따 사이크스-피코 협정이라고 부릅니다. 이 협정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이라크 등 현대 아랍 국가의 국경선이 그어졌습니다
지난 백 년 간 이 국경선을 바꾸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습니다. 범아랍 민족주의의 전성기 때조차 그랬습니다. 1990년 사담 후세인은 잘못된 꿈을 꾸며 쿠웨이트를 침공했습니다만 재앙으로 끝났습니다. 후세인은 권력은 몰론 자신의 목숨까지 잃어야 했습니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난 지금, 역설적으로, 이름없는 작은 조직이었던 ISIL이 후세인이 못한 것을 이뤄냈습니다. 이라크와 시리아에 걸친 넖은 땅의 지배권을 선언하면서 두 나라 사이의 국경을 없애버렸습니다. 사이크스-피코 체제에 처음으로 성공적인 도전을 일으킨 것입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잘못된 이념에 빠진 극단주의 조직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꼭 종교적 이유뿐만이 아니라 과대망상에 의한 것이거나 순수하게 범죄를 위한 이유로 모인 집단도 있었지요. ISIL은 이런 관점에서 독특한 사례도 아니고 전례 없는 사례도 아닙니다. ISIL은 다른 극단주의 세력과 차이점이 있다면 그건 비현실적인 목표나 잔인한 살해방법에 있는 게 아니라, 이 조직이 부상하게 된 갑작스러움과 영토를 확장한 그 속도에 있습니다. 겨우 몇 달 밖에 안되는 시간 동안 변방의 한 분파에 불과했던 ISIL은 국제 정치의 중심 무대에 올라 지정학을 새롭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란,카타르부터 미국과 걸프만 연안 왕국들에 이르기까지 서로 적국인 나라들마저 ISIL 추방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공유하게 했습니다.
ISIL 종교적 기원과 이단성을 밝히고 ISIL의 잔인한 전술을 어떻게 종교가 정당화하는지 밝히는 것 등은, ISIL이 왜 빠르게 성장했는지, 어떻게 예기치못한 지배적 위치를 얻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탐구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진짜 대답은 아랍의 지정학적 변화에 있습니다. ISIL이나 그와 비슷한 폭력 조직이 확산할 여지와 탄력을 준 것은 바로 중동에서(정확히는 아랍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후퇴하면서 생겨난 전략적 정치적 진공상태였습니다
미국은 더이상 세계 곳곳 민감한 부분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변화를 관찰하고 조율할 능력이 없습니다. 미국 군사력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물론 엄청난 화력을 가진 미국은, 특정 국가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체제를 해체하는 일은 능히 할 수 있지만 씁쓸하게도 새로 뭔가를 건설하는 일엔 무능력했습니다. 전쟁 이후 폐허 위의 정치적 진공상태에서 미국은 한편으론 극단주의 조직의 성장을, 다른 한편으론 민족과 종파마다 내부적 갈등을 조장하는 토양을 마련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의 힘이 감퇴하면서 지정학적 진공사태가 출현했고 이는 시리아 혁명 때 더욱 노출됐습니다. 미국과 걸프만 연안 동맹국은 시리아 사태를 자기 뜻대로 종결지을 힘이 없다는 걸 증명했고, 이란과 러시아와 함께 영향력과 통제력을 두고 경쟁을 벌여야만 했습니다. 그 결과 초래된 정치적 진공상태를 찾아 이라크의 극단주의 지하드 조직이 재빠르게 이동해 자리를 잡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랍 사회 인구 구성이 복잡하게 발전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과거 식민지 시절, 제국주의 지배자는 종교,종파,민족,부족 등 다양한 사회적 집단 사이의 긴장관계를 다스리기 위해 정체성을 희석시키고, 억제, 억압하는 정책을 썼습니다. 이 역할은 나중에 제국주의 국가가 물러난 이후, 아랍 지역에 인위적으로 건설된 독립 국가들(포스트 식민주의 국가)에 의해 그대로 수행됐습니다. 이들 신생국들은 연약하고 피상적으로 남아있는 집단적 국가 정체성이라는 깃발 아래 가짜 현대화를 중첩하는 과정을 진행했습니다.
리비아, 이라크, 시리아, 예멘과 같은 포스트 식민주의 국가에서 허약한 정치 구조가 무너지자, 전통적인 아랍 민족 정체성과 유대감이 다시 재천명되고 있습니다. 훨씬 더 폭력적인 방식으로 말이지요. 수니파, 시아파, 쿠르드, 아랍, 이슬람교도, 기독교도 등이 분별없이 자해에 가까운 오싹한 광경을 보이며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런 편집증적인 적대감과 사회 혼란, 정치 갈등이 이슬람 극단주의자를 그 이념적 열정과 청교도적 욕망과 함께 잠재적으로 키우고 있습니다. 정치적 불만이 민족적 종파적 원한과 뒤섞여 알카에다,ISIL,기타 지하디스트 조직의 증오가 들끓는 거대 담론을 생산했습니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비극은 하향식 현대화, 인위적으로 그어진 포스트 식민주의의 국경선과 정치 체제의 실패에 대한 값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평화적 수단과 민중 시위를 통해 변화가 가능할 거라던, ‘아랍의 봄’에 걸었던 희망이 사라져버린 지금, 극단주의와 폭력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이 기형적이고 병적인 혼란의 자식들은 예전보다 더 흉측하고 치명적이며 앙심을 품은 것으로 보입니다.
민주적 정치 변화를 막는 걸프만 왕국과 독재 아랍 정권과의 오랜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최미국과 유럽 동맹국은 최근 일어난 쿠데타를 뒤에서 지휘하고 그 쿠데타의 정당성을 옹호하면서, 아랍인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투표 상자는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선거는 변화의 수단으로 의미가 없다. 선거 결과는 얼마든지 뒤집어지고 짓밟힐 수 있다. 폭력과 복수만이 암울한 너희 존재의 탈출구다.” ISIL과 지하드 조직의 주장에 이보다 더 강력한 신빙성과 정당성을 주는 것은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건대 아랍 지역은 강대국의 흥망성쇠를 반영하는 거울이었습니다. 이런 전략적 위치 때문에 권력 교체는 항상 인명 피해와 정치 사회적 불안이라는 비싼 값을 치뤄야만 했습니다. 오스만 튀르크부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영국,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이 그렇습니다. 근본적인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 한 혼돈과 비극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기사 출처: 알자지라
http://newspeppermint.com/2014/10/12/what-gives-legitimacy-isil/
시리아 난민문제는 유럽의 "원죄"다
"사람의 세계화"시대가 온다
2015.10.1 池田 信夫 번 역 오마니나
뉴욕에서 열린 유엔 총회 연설에서 아베 총리는 일본 정부가 시리아 난민 문제에 협력해, 8억 1000만 달러의 자금을 지원할 것을 약속했지만, 난민수용에 대해서는 "국제사회가 연계해 대처해야 하는 과제"라며 부정적이었다.
내전이 계속되고 있는 시리아에서 500만명이 출국해, 터키에는 200만명이 입국했다. 앞으로 유럽국가에 대한 입국신청은 100만명을 넘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일본도 난민을 받아 들여야한다"는 소리도 있지만, 이것은 단순한 휴머니즘으로 정리될 문제가 아니다.
"아랍의 봄" 때문에 내전과 혼란이 시작
EU(유럽 연합)정상회의는 이탈리아와 그리스에 머물고 있는 시리아 난민 12만명에 대해, 헝가리 등 동유럽 4개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각국에 할당을 결정했다. EU가 다수결로 결정을 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그만큼 이 문제는 복잡한 "역사 문제"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시리아 내전의 직접적인 원인은, 2010년에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으로 불리는 반정부 운동이 시리아에 파급된 것이다.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등에서는 독재 정권이 무너졌지만,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은 반정부 세력을 탄압해, 지금까지 17만 명의 사망자가 나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사드 정권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고있기 때문에 내전은 쉽게 수습되지 않는다. 이에대해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유엔 총회 장소에서 열린 미러 정상회담에서 아사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는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양보하지 않았다.
"아랍의 봄"의 원인은, 걸프 전쟁 이후, 서구 국가가 아랍의 분쟁에 개입해, 특히 이라크 전쟁으로 미국이 이라크를 무력으로 "민주화"한 것이다. 구미적인 민주주의가 아랍사회에 확산된 결과, 독재정권에 대한 반란이나 혁명이 속출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후에 태어난 것도 독재정권이었다. 특히 이슬람 원리주의가 추진력을 얻어, 아랍 민족주의(라기보다는 부족주의)가 강해졌다. 민주정치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조건이 필요하다. 법치국가의 인프라와 의회제도, 사람들의 문화적 동질성 등, 어떤 것을 채택하더라도 아랍국가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다양한 종교와 언어를 가진 부족을 통치하기위해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일정한 독재가 필요했다. 그것을 미국이 파괴한 결과, 독재가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그래도 내전이 끝난 나라는 좀 낫지만, "시리아의 봄"은 당분간 끝날 것 같지 않다.
아랍를 파괴한 유럽의 "역사문제"
중동에서 이런 혼란이 일어나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예전에는 많은 부족을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법률로 완만하게 통일하고 있었지만, 제 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고 유럽국가들이 이것을 분단해 통치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가 1917년의 사이크스 피코 협정이라는 밀약으로 아랍를 남북으로 분단하고, 각 지에 괴뢰정권을 만들어 "위임 통치"라는 방식의 식민지 지배를 행했다. 게다가 영국이 "발포어 선언" 으로 이스라엘의 건국을 약속했기 때문에, 각국이 독립하자 예전보다 심한 부족 분쟁이 시작되었다.
특히 제 2차 세계 대전 후는, 유럽에서 박해받은 유대인이 이스라엘 국가를 만들고 팔레스타인을 몰아냈기 때문에 여러 번에 걸친 중동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구미, 특히 유대인의 정치력이 강한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했기 때문에 혼란은 더욱 확대되었다.
이것은 유럽의 역사로 말하면 중세 말기의 종교 전쟁과 유사하다. 신성 로마제국과 카톨릭 교회에 의해 완만하게 통합되었던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각국의 영주는 개신교와 가톨릭으로 나뉘어 수백 년에 걸친 내전이 시작되었다.
1648년 베스트 팔렌 조약으로 양측이 타협해서 주권국가라는 제도를 만들어, 국내에서는 전쟁을 금지하고 종교도 통일하게 되었다. 그래도 국가와 국가의 전쟁은 합법화되었기 때문에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어,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은 파멸했다.
이 역사를 이슬람 국가는 400년 정도 늦게 반복하고 있다. 지금은 아직 시아파와 수니파의 종교전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베스트 팔렌 이전"의 상황이다. 이러한 내전을 조정한 것이 정교분리에 따라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는 자유주의였지만, 이슬람은 정교일치가 원칙이므로,이 전쟁은 당분간 끝날 것 같지않다.
한때 아랍를 정리했던 오스만 제국을 분할해, 각 국을 식민지 지배해서 부족분쟁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말았던 유럽의 "원죄"이기 때문에, 따라서, 그들은 난민수용을 거부 할 수없다. 그것은 흑인 노예 덕분에 번영한 미국이, 그 죄를 지금 보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과 같다.
일본은 난민을 받아 들여야 하는가
이슬람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본주의보다 철저한 글로벌리즘이다. 자본주의는 상품과 자본의 이동을 글로벌화할 뿐이지만, 이슬람 원리주의는 국경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계를 이슬람으로 통일하는 사람들의 글로벌리제이션을 이상으로 하기때문에, 알라신과 개인 사이에 어떠한 국가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까지 EU 국가들은, 이슬람 계 노동자를 저임금으로 고용해 이익을 얻어 왔지만, 앞으로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밀려들면 사회는 혼란하게 된다. 그러나 원죄를 짊어진 유럽은, 어떠한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할지라도 난민을 받아들일 의무가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국경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은 베스트 팔렌 조약 이후이며,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이동할 수 없게 된 것은 근대 유럽의 주권국가 만의 현상이다.
만약 사람들의 이동이 완전히 자유로워지게 되면, 국가주권은 부정되고, 전쟁도 없어진다. 물론 그런 일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국경과 국가주권은 명백한 개념이 아니다.
"일본도 시리아 난민을 받아 들여라" 라는 논의가 있지만, 일본과 같이 동질성이 높은 사회에 이슬람 계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문화적으로 곤란하며, 무연금자와 무보험자가 대량으로 출현해 사회보장이 파탄한다. 유럽과 같은 역사적 책임을 지고 있지 않은 일본이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일 의무는 없다.
그러나 일본도 언젠가는 난민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때에 대비하기 위해도 일본 사회는 보다 문화적 종교적 다양성에 관용을 가질 필요가 있다. 20세기가 자본의 글로벌리제이션의 시대였다고 한다면, 21세기는 사람의 글로벌리제이션의 시대가 된다는 것을 각오하는 편이 좋다.
http://jbpress.ismedia.jp/articles/print/44902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은 영국 정부의 외교정책 방향이 담긴 문서로, 밸푸어 선언이라는 명칭은 1917년 당시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가 문서에 서명한 데서 기원한다. 1917년과 1926년 2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1917년 선언
1917년 11월 2일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밸푸어가 이끄는 영국 외무성이 당시 유대인을 대표하는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공식적으로 보낸다.
영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Foreign Office,
November 2nd, 1917.
Dear Lord Rothschild,
I have much pleasure in conveying to you, on behalf of His Majesty's Government, the following declaration of sympathy with Jewish Zionist aspirations which has been submitted to, and approved by, the Cabinet.
"His Majesty's Government view with favour the establishment in Palestine of a national home for the Jewish people, and will use their best endeavours to facilitate the achievement of this object, it being clearly understood that nothing shall be done which may prejudice the civil and religious rights of existing non-Jewish communities in Palestine, or the rights and political status enjoyed by Jews in any other country".
I should be grateful if you would bring this declaration to the knowledge of the Zionist Federation.
Yours sincerely,
Arthur James Balfour
타자되었으며 밸푸어의 서명이 되어 있다. 본문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세우고, 그 일을 성취하는 데 대하여, 팔레스타인에 거하는 비 유대인의 시민적 그리고 종교적인 권한에 대해, 또는 타국에 거하는 유대인의 정치적인 상태에 대해 아무런 편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사실상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서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겠다는 것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서신이다. 하지만 이미 밸푸어 선언 이전인 1915년 10월에 헨리 맥마흔이 후세인-맥마흔 서한을 통해 전후 아랍인의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런 영국의 모순된 행동으로 결국 전 후 유대인세력과 아랍세력의 분쟁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팔레스타인 국기 유엔본부에 사상 첫 게양
2015-10-01 11:03
팔레스타인 국기가 30일 처음으로 유엔 본부에 게양돼 휘날리고 있다. 뉴욕/AP 뉴시스
팔레스타인 국기가 유엔본부에 사상 처음 게양됐다. 30일 열린 게양식에는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반기문 사무총장, 러시아와 프랑스 외무장관 등 각국 대표들이 참석했다. 국기가 게양되자 박수와 환호가 터졌고 같은 시간 팔레스타인 수도 라말라 한복판 모인 군중들은 대형멀티비전으로 생중계를 지켜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9월 30일 유엔 본부에서 거행된 팔레스타인 국기 게양식에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등과 함께 참석하고 있다. 뉴욕/AP 뉴시스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9월 30일 유엔 본부에서 거행된 팔레스타인 국기 게양식 도중 국기로 얼굴을 감싸며 감격스러워하고 있다. 뉴욕/AP 뉴시스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두손에 팔레스타인 깃발을 받쳐들고 게양 요원에게 건넬 준비를 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국기가 30일 처음으로 유엔 본부에 게양돼 휘날리고 있다. 뉴욕/AP 뉴시스
팔레스타인 국기가 30일 처음으로 유엔 본부에 게양돼 휘날리고 있다. 뉴욕/AP 뉴시스
1988년에 독립을 선언한 팔레스타인은 2011년에 유네스코에 가입했고 2012년 유엔의 옵서버 국가가 되었다.
현재 유엔 회원국 193개국 가운데 135개국이 팔레스타인을 독립 국가로 인정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출처 : 달러와 금 관련 경제소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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