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있으라!
“주인공아! 예! 정신 바짝 차려라! 예 깨어 있으라! 예!”
예전에 고승이 이와 같이 공부했다고 한다. 하루 종일 앉아서, 이렇게 스스로에게 명령하듯이 말하면서 공부했으며 견성하였다고 한다.
불교에서 수행방법이 매우 많으며, 표현 역시 매우 많다.
왜 고승은 매일 이렇게 공부했을까?
이것은 다음과 같은 모순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바깥 사물은 마음 안에 있는 것인데, 동시에 바깥 사물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바깥 사물을 인식하여, 평상시 생활 중에서 파악한 정보에 의거하여 생활한다.
사물의 피상적인 모습을 파악하여 응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물을 인식한 것은 그 사람 자신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다.
사물을 인식하여, 이것을 바탕으로 타인을 지배 조종하려는 자들이 있다. 사물은 인식대상이 아닌데, 기어히 억지를 부려서 무엇이라고 확정짓고서 무엇을 하고자 기획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죄를 짓게 되고, 자신이 인식한 틀 안에 갇히게 되며, 계속 고집을 부리면 스스로의 감옥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무위(無爲)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무엇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무위(無爲)는 실천가능한 것인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평상시 생활이 유위적인 것이지, 무위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옛 고승은 위와 같이 공부를 한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 욕망 등을 분명히 인식하고 깨어 있을 뿐인 것이다. 무엇을 하고자 하면 그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이러한 상태를 명백하게 인식하고 각성상태에 있는 것이다. “할 뿐인 것이다.” 그냥 할 뿐이지, 아무것도 아니다. 무엇을 의도하여 기획을 하고 있더라도, 그냥 할 뿐인 것이다. 그 마음을 계속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활하는 것이 이 사회에서 타인과 마찰이 없이 원활하게 생활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깨달은 것을 진리라고 우기면서 고집을 부리면 정말 괴롭기만 한 것이다. 자신도 괴롭고 타인도 괴로운 것이다.
또 하나는 우리들의 언어 속에는 “채찍과 당근”이 있다. 인터넷 사이트를 검색해보아도 역시 채찍과 당근이 있다. 다른 말로 바꾸면, 협박과 희망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타인을 내 의도대로 움직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뜻이다. 타인을 조종하려는 불량한 마음이 이미 내포된 것이다. 타인을 내 뜻대로 움직이고자 하는데, 문제는 자신의 뜻 자체가 문제를 안고 있다. 자신의 뜻은 무엇인가? 바깥 사물을 파악한 정보에 의한 욕구이지 않는가?
내 뜻대로 타인을 조종하여 움직여서 진행을 하다보면, 커다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차라리 개입을 하지 말 것을 하면서 후회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떤 자는 자신을 탓하지 않고 타인이 자신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탓하기도 한다.
사람은 자신의 수준에서 사는 것이 더 타당하다. 보통 문제에 부딪히면, 전문가의 조언, 선배의 조언을 구하는데, 일시적으로 도움은 되지만, 그의 조언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디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문제가 발생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을 구하기 어렵게 된다. 여러 가지로 뒤틀려 있어서 풀기 어려운 난제가 쌓이는 것이다. 맨 처음의 조언자에게 질문을 해도 그 역시 해결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인생을 직접 살아가는 당사자의 문제는 당사자가 가장 잘 아는 것이다. 타인은 어디까지나 피상적으로만 아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어리석더라도 그냥 어리석은 대로 사는 것이 좋은 것이다. 자신의 지혜 수준대로 사는 것이 문제를 풀기 좋은 것이다.
밖으로 스승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서 문제의 해답을 구하는 것이 더 빠르고 좋은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의식이 명백하게 깨어 있게 하는 것이다.
불경을 다시 보니, 부처님 말씀은 수행자는 잠을 자서는 안 된다.
잠을 자지 말고, 정신이 똑 바로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설령 꿈을 꾸고 있더라고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요즘말로 자각(自覺)몽(夢)이라고 한다.
수행자는 공부가 깊어지면, 설령 잠을 자더라도 꿈이 없어진다고 한다. 흐리멍덩한 의식 상태는 없어지는 것이다. 또 수행이 깊어지면, 꿈을 꾸더라도, 꿈 속을 통제할 수 있다고 한다. 꿈 속에서 흐리멍덩하게 쫓긴다거나, 돈을 줍는다거나 하는 것은 이미 수행상태가 매우 좋지 못하다.
잠이 들기 전에는 다시 한번 자신의 의식을 가다듬고, 주인공을 각성시켜 놓고, 꿈 속에서 흐리멍덩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것이다. 적어도 자각몽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꿈을 꾸고 있음을 명백히 알고 있어야 되는 것이다.
깨어 있을 때에 사회생활하면서, 타인과 충돌이 일어나는데, 이 때에도 명백하게 각성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죄를 범하고 여부는 떠나서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자는 불의(不義)는 참지 못하고, 타협은 절대로 안하기로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우면 상대방은 공포심을 느끼고 해치려는 마음을 품게 된다. 그래서 불교 수행자는 깨달음을 강조하지, 행동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다. 부도덕한 행위는 따지지 않고, 그가 견성했는가? 또는 그가 깨달음의 수준이 어떠한가?만을 따지는 것이다. 그가 어떤 행위를 할 때에 명백히 각성상태에서 그 행위를 했는가? 아니면 흐리멍덩하게 그 행위를 했는가?를 따지는 것이다. 부도덕한 행위와 부조리한 행위를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라고 자신을 못 박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의 마음 상태를 관찰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당신 보고 어떻게 행동하라고 말할 수 없다. 자신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다. 이 사회는 죄 짓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언행 자체가 이미 업을 짓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만 이야기 하지, 행동요령을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다. 행동요령이 자신이 정하고 자신이 부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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