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경제

[스크랩] 70년대 1, 2차 오일 쇼크

wisstark 2018. 2. 6. 20:59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유전이 발견된 이후 활용도가 미비했던 석유는 내연기관의 연료로 사용되기 시작하자 전쟁과 교통에 절대적인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다. 특히 석유화학의 발전은 석유를 전 산업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들었다. 20세기 이후의 많은 전쟁과 외교는 이 검은 황금을 확보하려는 목적하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석유의 파괴력이 보다 강력해진 계기는 1973년과 1979년에 발생한 석유파동일 것이다. 제1·2차 석유파동은 전 세계를 불황에 늪에 빠뜨렸으며, 스태그네이션(침체)과 인플레이션(물가상승)이 동시에 일어나는 스태그플레이션을 발생시켰다. 당시 이것은 새로운 경제현상이었다.

그런데 석유파동은 단순히 당시 중동지역의 전쟁과 OPEC의 감산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 물론 전쟁의 경우는 에너지위기에 대한 공포심을 유발시킬 수 있는 큰 원인일 수 있다. 그러나 석유가 급등할 정도로 세계에 석유 공급이 부족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1. 제1차 석유파동 전까지

1948년 마셜플랜의 시작과 1973년 제1차 석유파동 사이의 25년 동안 석유의 소비는 6배 증가했다. 또 석유는 산업혁명 이후 세계 에너지 수요의 65% 이상을 담당하면서 1950년대까지 왕위를 지키고 있었던 석탄의 자리를 끌어내렸다.

* 마셜플랜(Marshall Plan)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미국의 서유럽 16개국에 대한 대외원조계획을 말한다. 정식 명칭은‘유럽부흥계획’이지만, 원조계획을 처음으로 주장한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마셜(G. C. Marshall)의 이름을 따서 마셜플랜이라고 부른다.

석유의 이러한 신분 상승을 이끈 가장 큰 원인은 자동차의 대중화였다. 1950년~1975년까지 자동차의 수요는 세계적으로 5,300만 대에서 2억 5,000만대로 급증했다. 또한 비행기·선박 등의 운송수단의 발달을 가져와 무역을 활성화했으며, 문명 초기 시대부터 사용되어 온 가장 보편적인 물질을 완전히 대체해 버린 플라스틱의 등장은 석유의 위대함을 다시금 느끼게 해주었다.

당시 이러한 소비 증가와 이에 따른 에너지 고갈에 대한 각종 보고서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양의 석유가 아메리카 대륙과 중동에서 생산되었다. 석유가 범람하자 1960년대 말까지 중동과 미국은 인위적으로 석유 생산을 규제했다. 하지만 아무리 억제해도 솟아 나오는 석유를 감당하기 힘들었고, 석유 가격은 꾸준히 하락했다. 그 결과 1950년대 배럴당 2달러였던 석유는 1970년에 이르자 1.21달러까지 내렸다. 특히 중동산 원유는 세계에서 가장 저렴했다. 20년에 걸쳐 저렴한 가격으로 석유의 공급량이 증가하자 많은 나라에 과다 사용이라는 잘못된 소비 습관이 심어졌고, 특히 값이 싼 중동산은 세계가 중동산 석유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국에서 1971년,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8월 15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성립한 달러의 금 연동을 해체한다고 발표했다. 1945년 브레튼우즈 체제를 통해 전 세계는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고, 달러를 1온스당 35달러로 고정하는 금본위제를 시행해 왔다. 그러나 미국은 기축통화의 지위를 사용하여 달러를 무한정 찍어내기 시작했다. 달러가 많이 발행되면 그 가치가 하락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금에 고정되어 있었던 달러는 많은 양을 찍어낼수록 미국에게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1970년 미국은 경제가 침체의 길로 들어서자 저금리정책으로 달러의 유동성을 키웠고, 설상가상으로 베트남전쟁까지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 비용을 세금 인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돈을 찍어내 충당하면서 달러화의 과대평가는 극에 달하게 되었고, 해외 다른 나라들은 달러를 믿지 못하게 되어 금과의 태환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1971년 미국의 공식 금 준비금은 공공부채의 1/4도 채 되지 않았다. 결국 닉슨은 달러의 금태환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미국은 석유의 가격 상한제를 실시함으로써 산유국 입장에서는 상당한 불만을 갖게 했다. 달러가 풀리고 인플레이션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자 닉슨은 석유 가격을 찍어 눌렀고, 이는 저평가된 석유의 수입과 소비를 여전히 증가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당시 세계 모든 석유거래의 기준통화였던 달러의 평가 절하는 산유국 입장에서는 이익분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과 같았다. 이에 따라 산유국은 석유 가격을 인상하기 시작했다. 이미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세븐 시스터즈의 힘이 약해졌으며, 대부분의 유전이 국유화되어 산유국의 수중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이렇게 석유의 실질적인 패권이 산유국으로 넘어가자 다급해진 석유회사들은 공급 부족을 대비하기 위해 입수 가능한 모든 석유를 매점하려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2. 제1차 석유파동

이렇게 유가 상승에 대한 압박이 심한 상황에서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침공하는 욤키푸르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중동의 산유국들은 세계 석유의 중동으로의 집중화, 유전의 국유화, 이스라엘의 중동국가 건설에 대한 서방의 승인 등의 여러 가지 면에서 고유가를 이끌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욤키푸르 전쟁이 발발하자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닉슨에게 무기 원조를 청했다. 그런데 이에 응한 닉슨이 대낮에 무기를 지원해 주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이사실을 즉각 알게 된 산유국들은 보복 조치를 취하게 된다.

1973년 10월 16일 페르시아만 6개국 OPEC 대표들은 아라비아 경질유 가격을 배럴당 2.9달러에서 5.11달러로의 인상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다음달인 17일에는 5%의 석유 감산을 알렸고, 이스라엘이 1967년에 점령한 지역에서 철수하지 않을 경우 매달 5%씩 추가 감산하겠다는 조치를 취하기까지 이른다. 또한 아랍에 우호적인 국가들은 이 결정에 영향을 받지 않고, 반대로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국가들에는 석유 수출을 금지한다고 협박했다.

이러자 유가는 4배의 인상률을 보이면서 전 세계를 강타했다. 석유자원을 갖지 못한 제3세계 국가들에게 이러한 유가의 충격은 재앙과 같았다. 인도, 수단, 파키스탄, 필리핀, 한국, 태국,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전역의 나라들은 1974년에 무역수지 적자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IMF에 따르면 1974년 개발도상국들은 당시로서는 거대한 규모인 총 350억 달러 규모의 무역적자에 시달렸는데, 이는 1973년 적자의 4배에 해당하는 규모로 유가 인상율과 정확히 정비례했다. 1970년대까지의 견실한 산업 및 무역성장이 1974년~1975년에는 세계 경제 전반에 걸쳐 급격히 위축
되었다.

3. 제2차 석유파동

제1차 석유파동은 1974년 석유 수입국들의 기구인 국제에너지기구를 설립하도록 했고, 또 세븐 시스터즈의 시대가 끝나고 석유의 새로운 강자인 OPEC의 시대가 출현함을 알렸다. 그러나 20세기 초 세계 석유시장을 장악했던 스탠더드오일의 록펠러부터 7대 석유회사 그리고 OPEC에 이르기까지 에너지의 소수 독점 시대는 여전히 이어졌다.

제1차 석유파동 이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듯 보였던 달러의 가치는 여전히 하락하고 있었고, 인플레이션 압박은 매우 심했다. 또한 유가가 급등하자 유가 재앙론자들은 곧 원유 부족 시대가 올 것이라는 각종 보고서를 쏟아냈다. 특히 1980년대에 이르면 석유 부족 사태가 심각해져 가격이 지금보다도 더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많이 나왔다.

이러한 비관론이 국제에너지기구에서까지 흘러나오는 상황에서 이란에서 쿠테타가 발생했다. 이제 이란의 정권은 팔레비 국왕에서 호메이니로 넘어가게 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1978년 1월 석유가 풍부한 동쪽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같은 해 12월 27일에는 소련이 이란과 1,000km의 국경을 나누고 있었던 아프가니스탄을 침범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이어지면서 중동의 정세는 최악의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대한 여파로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를 감산하기 시작했고, 비관론자들의 석유위기설 등이 이어지면서 유가는 다시 춤을 추게 되었다. 인플레이션과 달러화의 가치 하락, 그리고 제1·2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1973년 이후 6년 동안 전 세계의 에너지와 운송비용이 1,300% 폭등한 것이다. 세계 경제는 깊은 불황에 빠졌으며 기축통화인 달러의 위상은 추락하고 있었다.

4. 석유파동의 진실

석유파동으로 인한 유가 상승은 닉슨 쇼크로 대변되는 달러화의 가치 절하와 중동지역의 극도의 정세 불안이 분명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산유국들의 공급 부족이라는 원인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제1차 석유파동이 극에 달했던 1973년 10월부터 12월까지 총생산 감소량은 1973년 전 세계의 재고에도 못 미치는 아주 미미한 양이었다. 심지어 1975년에는 총생산량의 35%를 삭감해야 할 정도로 과잉생산이었으며, 제2차 석유파동에서조차도 세계 석유 공급량은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석유 가격의 급등은 실질적인 공급 부족이 아니라 심리적인 현상이었다. 특히 석유비관론자들의 계속되는 석유위기설과 언론에서 보도되는 중동의 정세 불안은 유가에 대한 심리를 자극했다. 제1차 석유파동 이후 대체에너지로서 원자력발전소가 떠올랐었다. 그런데 1973년 3월 펜실베니아 스리마일 섬의 원자력발전소에서 대부분의 원자로가 완전히 녹아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고로 산업국가들은 실망이 컸고, 암울한 전망은 더 힘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석유파동은 유가가 올라 세계 불황을 일으켰다는 단순한 사실에 끝나지 않는다. 제1차 석유파동 이후 유가의 급등으로 OPEC은 막대한 오일 달러를 벌어들이게 된다. 그런데 이들은 이스라엘을 도와준 영국과 미국의 금융기관에 돈을 맡기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1974년에 벌어들인 570억 달러 중 무려 60% 이상이 영미 금융기관에 흘러들어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과 오일 달러의 일정 부분을 미국 재무부 증권에 투자하기로 협정을 맺었다.

더 이상한 것은 1975년 이후 석유 수출대금을 무조건 미국 달러화로만 받기로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전부터 석유의 달러 결제는 관행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제1차 석유파동 이후 유럽의 선진국들은 석유를 구입할 때 자국 내 통화를 사용하려고 많은 노력을 해왔다. 석유의 유일한 결제통화인 미국 달러화는 석유가 필요한 세계 다른 나라들의 달러의 수요를 극대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막대한 오일 달러는 영미 금융기관에 흡수되고 달러의 완벽한 석유본위제로 인해 제3세계 국가는 이 영미 금융기관으로부터 달러를 빌리게 된다. 유가가 올라 적자폭은 커졌으며 이 적자를 메우고 또 석유를 구하기 위해 제3세계 국가들은 달러가 필요했다. 미국으로부터 나온 달러는 중동 산유국으로 가고, 다시 영미 금융기관으로 가고, 다시 제3세계 국가로 흘러가는 대순환을 일으키게 된다.

세계에 이렇게 달러가 넘친다는 것은 당연히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있을 뿐 아니라 달러화 가치가 바닥을 기게 된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된다. 1978년 이래 달러화는 유럽의 주요 통화에 15% 이상 평가 절하되었으며, 1979년에는 닉슨 쇼크 전 금 온스당 1달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금은 온스당 400달러를 기록하게 된다. 달러라는 기축통화의 붕괴가 곧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극적인 반전이 시작되었다. 1979년 10월 미국 연방준비위원회(FRB)의 의장이던 폴 볼커는 인플레이션 종식과 달러화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목적하에‘토요일의 학살’을 일으킨다. 기준금리를 12%로 급격하게 인상한 것이다. 그리고 전 세계의 놀라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1981년에는 금리를 20%까지 끌어올렸다.

이러한 볼커의 통화 충격은 몇 가지 결과를 낳게 되었다. 먼저 급격한 금리 인상은 대출자들은 모조리 학살시켰다. 세계 대공항 이후 최고의 불황을 야기하게 되었다. 물론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달러가 다시 미국 내로 환류되며 달러화 가치는 상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사건은‘3세계의 외채 위기’가 터진 것이다.

석유위기를 겪는 동안 영미 금융기관으로 흘러간 막대한 자금은‘변동금리’로 석유적자를 매우기 위한 제3세계에‘외채’로 뿌려졌다. 1973년 1,300억 달러였던 개발도상국의 외채가 1981년에는 5,500억 달러에 이르렀으며, 1982년에는 6,120억 달러로 무려 5배나 확대되었다. 변동금리로 막대한 외채를 끌어들였던 개발도상국들은 그 자리에서 초죽음이 되었다. 제3세계들의 외채 부담이 급격하게 늘어나자, 영미 금융기관의 채권단과 IMF는 채무 상환 프로그램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우리가1997년 겪었던 것처럼 막대한 구조조정과 쓸 만한 공기업들이 민영화되며 외국에 헐값에 팔려 나갔다. 그리고 많은 자원 개발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예산의 이자비용이 증가하여 자국 내 인프라 및 공공사업은 전혀 할 수 없었으며 사회복지는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 제3세계 국가들은 사채업자들에게 볼모로 잡힌 노숙자 같은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심지어 1980년에서 1986년 사이 109개 채무국이 외채에 대해 채권자들에게 지급하는 이자만도 무려 3,260억 달러나 되면서 오히려 자본이 선진국으로 빨려가게 되었다. 1986년 109개국의 총 외채는 8,820억 달러에 이르렀다. 미국의 수뇌부와 영미 금융기관 그리고 석유 카르텔이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기획했는지 안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볼커의 통화 충격은 1970년대를 휩쓸었던 위기에 승자와 패자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알려주었다. 미국의 석유 패권에 도전하던 유럽 선진국들은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했으며, 미국의 달러는 여전히 유일한 강자임을 입증시켰다. 산업화로 성장하던 개발도상국들은 불황과 함께 외채위기에 빠져 영미 금융기관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족쇄가 채워졌고, 그들의 부를 불려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특히 1980년 이후 석유의 대체에너지로 각광 받던 원자력발전소의 거의 모든 계획이 순간 물거품이 되기까지했다.‘ 검은황금’에 도전한‘핵장미’는 처절하게 짓밟혔다.

석유파동과 볼커의 통화 충격이 주는 진실은 우리에게 세계 패권의 3가지 조건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헤게모니의 3대 요소는 군사력, 기축통화(경제력) 그리고 에너지이며, 여전히 패권자는 미국이라고 말이다.
출처 : 달러와 금 관련 경제소식들
글쓴이 : 교차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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