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 명상

[스크랩] 이젠 왜 명상하는지 묻지 말라

wisstark 2013. 2. 2. 16:38

 

요즘 스펙을 넘어 자기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 새로운 트렌드가 되고 있다. 어떤 학교, 어떤 직장이냐가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 스스로 감동할 만한, 누군가를 감동시킬 만한, 자기 체험이 밑바탕이 된 나만의 스토리를 갖고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것.

자기 체험은 자신의 몸으로부터 시작된다. 몸의 감각을 깨워 몸과 마음이 불이不二, 둘이 아닌 하나임을 체험하는 것은 자기 혁명의 시작이다. 자신의 몸에서 시작하는 감각 체험.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명상이다.



누군가 그러더라. 사람들이 왜 점집을 찾는지 아느냐고? 미래가 궁금해서? 아니란다.
“당신은 본래 이런 사람이야, 이런 재능, 이런 성격을 갖고 있는데 사람들이 몰라주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어, 사는 게!”

토닥토닥, 이렇게 심리적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언제부턴가 지구별 주민들은 지독한 애정결핍증에 시달리고 있다. 아이도 어른도 모두 마찬가지다.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래?”라는 부모의 말 속엔, “난 널 사랑해! 하지만 네가 능력 없는 사람이 되는 건 견딜 수 없어! 너에게 투자한 만큼 성과를 보여!”라는 무의식이 투사된 메시지가 담겨 있다.

내가 아는 십대 중에 승부욕이 강한 여자 아이가 있다. 무엇을 해도 이기려 든다. 도전 의식도 강하고 경쟁 체제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성향의 아이다. 이 아이와 한 학기 동안 글과 그림으로 자유롭게 자기 표현을 하는 수업을 했다. 이 수업 또한 잘 했다.

그런데 학기 마지막 시간에 주관적인 자기 평가서를 작성하게 했는데, 자기 표현력을 100점 만점에 13점을 줬다(다른 아이들은 대부분 90점부터 무한대까지 높은 점수를 줬다). 정작 주관적인 자기 평가에는 최하 점수를 준 이 아이는 평소에 몹시 불안하고 자신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노력을 한 것이다. 말하자면 ‘노력병’에 걸린 셈이다. 

2010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의식에서 도둑질보다 더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죄의 덕목은 ‘능력 부족’과 ‘게으름’이다. 여기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능력’ 혹은 ‘실력’은 자본주의 시장판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고의 덕목 아닌가. 이 덕목을 쌓기 위해 우리는 지독하게 노력하며 산다.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서 애쓴다, 다들.


‘나’를 들여다보게 하는 명상의 힘

사람마다 수치는 다를 수 있겠으나, 누구나 인생의 ‘상처값’이라는 것을 갖고 있다. 그 상처값은 자존감이 높은가 낮은가에 따라 좌우된다.

나 자신보다는 남을 의식하며 살기, 그로 인해 스트레스 받고 그 스트레스가 내 몸을 망가뜨리게 하는 것을 방치하기, 내가 그래 온 것처럼 나의 아이도 남을 의식하며 살게 하기, 직장에서도 인정받는 노력주의자 되기,

스트레스를 잘 관리하는 모습을 통해 자기 조절 능력이 강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기, 약하고 못난 모습 숨기기, 이런 모든 자기 방어를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며 살기….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이 같은 삶의 방식에 의해 상처값은 올라간다.

상처값이 높은 사람의 경우, 자기 성찰의 길목으로 들어서게 하는 ‘명상’은 불편해서 피하고 싶은 것일 수 있다. 투철한 자기 방어에 익숙한 이들에게 자기 성찰은 현실을 회피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고, 자신이 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과정이니까 말이다.

심리학자 칼 구스타브 융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예전부터 나는 많은 사람들이 되도록 이성을 사용하지 않으려 하거나, 이성을 쓰더라도 놀라울 정도로 미련하게 쓰고 있다는 사실에 큰 인상을 받아왔다.

또, 이지적이고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들이 전혀 자기의 감각기관을 사용하지 않는 데 놀랐다. 그들은 자기 눈앞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채, 귀에 들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채, 느끼면서도 촉감을 모르는 채, 먹으면서도 맛을 모르는 채 살고 있었다. 자기의 신체 상태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채로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데는 학교 교육도 한몫했다. 공교육에서 오랫동안 교사 생활을 한 존 테일러 개토는 《바보들의 동맹, 의무교육이라는 독재》라는 칼럼을 통해서 “곧 아무 비판 없이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한 무지보다 훨씬 위험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사고 통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개인의 지성이 갖고 있는 타고난 힘을 없애버린다. 그 힘을 아주 말끔히 없애버림으로써 독창적인 사고가 어려워진다. 이것이 처음부터 학교 설립의 목적 가운데 하나였다”라고 밝힌 바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성이란 생각하고, 느끼고, 실천하는 것이 통합된 지성을 말하는 것일 테다. 수많은 우둔한 자 가운데 하나인 ‘나’ 또한 부모에게 인정받기 위한 길과 내가 원하는 삶 사이에서 갈등하고, 조직에서 인정받기 위한 길과 내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며 그렇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쉽게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 점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칭찬 혹은 인정은 내 몸의 세포들을 “야호!” 춤추게 한다. 다만, 내가 그렇게 애쓰고 있다는 것을 바라보고 위로하거나, 혹은 그렇게까지 애쓸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해줄 줄 알게  되었다. 또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명상의 힘이다.


“의미 있는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국내에서는 1990년대 초반부터 명상이 대중화의 첫걸음을 떼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0년 동안 명상은 자기 개발, 부모 교육, 기업체 사원 교육 등의 콘텐츠로 다양하게 활용되고 발전해왔다.

굳이 명상이라는 용어를 붙이지 않더라도 ‘인성’ 혹은 ‘심리’ 문제와 연관되어 새로운 시대의 대안이 되는 삶의 방안으로 이야기하고 실천하고 있기도 하다.

명상을 위한 명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지면서 부모의 양육 태도를 변화시키는 자기 치유 과정이나, 기업체 내에서 조직원 간의 갈등을 해결하고 조직의 비전을 개인의 비전으로 내면화하기 위한 교육으로 활용되고 있다.

돌이켜보면 농경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우리 민족에게는 이런 명상적인 기능들이 문화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마을 축제를 통해서, 현대에는 미신이라 터부시하는 다양한 상징 체계를 통해서 무의식을 표현하고 자연 혹은 우주와 연결됨을 느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합리주의와 이성적 사고는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해방을 불러왔지만 그 과정에서 상실한 것들도 많다. 특히 나와 나 자신, 나와 다른 사람, 나와 자연, 나와 우주와 관계를 소통시키는 연결 감각을 잃어버렸다.

지구별 전체가 일종의 정신분열 상태에 빠진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정신과 의사에게 원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아래 질문에 대한 답 아닐까.

“삶에 의미가 없어요. 의미 있는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 존재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 루저가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 병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의 인격대로 마음껏 정신 활동을 펼칠 공간을 원하고 있을 것이다.

푸에블로 인디언들은 자신들이 ‘아버지 태양’의 자손이라고 믿는다. 이 믿음은 그들의 존재를 한정된 존재에서 넘어서게 하고, 삶에 대해 대단히 넓은 시야(그리고 목표)를 제공한다.

자기 존재에 보다 넓은 의미가 있다는 느낌은, 한 인간을 단순히 소유하고 소비하는 존재로부터 보다 나은 존재로 도약하게 한다. 그런 의미를 느끼지 못할 때 인간은 자신을 비참한 존재로 인식한다.

 

과거를 만나고 미래를 복원할 상상력을 깨우다.

얼마 전, 7백여 년 된 연꽃 씨앗이 꽃을 피웠는 뉴스를 들은 바 있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해보니 약 7백 년 전 고려시대의 씨앗이었다고 한다(사적 67호로 지정된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에서 연못의 퇴적층을 발굴하던 중 발견되었다).

흙 속에 묻혀 있던 7백 년의 시간 동안 연꽃 씨앗은 죽어 있었던 걸까, 살아 있었던 걸까? 생과 사를 초월한 그 시간, 연꽃 씨앗은 보이지는 않지만 생명의 에너지를 품고 있었다.

당신 그리고 나, 곧 개인이야말로 유일한 현실이다. 당신은 당신만의 시간을 갖고 태어났다. 나도 나만의 시간을 갖고 태어났다. 그 시간은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가 동시에 존재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명상을 통해 인류의 지혜가 담긴 과거를 만나고, 미래를 새로이 복원할 수 있는 상상력을 깨울 수 있다.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창조성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감각을 회복해야 한다. 그렇게 했을때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우리가 꿈꾸는 바를 거스르는 생활방식과 태도를 놓아버릴 용기를 갖게 될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왜 섹스 하느냐고 묻지 않듯이, 우주적 사랑을 체험하게 되는 명상 또한 왜 해야 하는가 더 이상 물을 여지가 없는 게 아닐까?

yaongstar@naver.com">글·곽문주yaongstar@naver.com



[출처]뇌교육 두뇌포털 브레인월드 > 건강명상 > 이젠 왜 명상하는지 묻지 말라
http://kr.brainworld.com/BrainHealth/1469
출처 : 석산쉼터
글쓴이 : 碩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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