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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주한 미대사 습격사건, 중국의 대두에 흔들리는, 한국의 미국관 03월 23일 澤田克己

wisstark 2015. 4. 4. 00:49

駐韓米大使襲撃事件
中国の台頭で揺らぐ、韓国の米国観
かつて反米感情は存在しなかった

 

 

 

 

 

  주한 미대사 습격사건, 중국의 대두에 흔들리는, 한국의 미국관

 


                                      

 

                               <과거에 반미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2015년 03월 23일 (월) 사와다 카츠미(澤田克己)              번  역    오마니나


 

미국의 마크 리퍼트 주한 대사가 3월 5일 아침, 서울 도심의 세종 문화회관에서의 조찬모임에 참석한 자리에서 과도(길이 25 ㎝)를 소지한 김기종 용의자(54)에게 습격당해, 오른쪽 뺨을 80바늘이나 꿰매는 큰 부상을 입었다. 일본에서도 1964년 에드윈 라이 샤워 주일 미대사가 괴한에게 칼로 습격당해 중상을 입은 사건이 일어났지만, 최근에는 동맹국의 수도에서 미국 대사가 습격당하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만큼 국제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습격당한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 (사진 : Yonhap / 아프리카)>


김 용의자는, 2010년에는 서울 시내에서 강연하던 일본의 시게이에 도시노리 주한 일본대사에게 돌을 던져, 외국 사절에 대한 폭행 혐의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의 유죄판결을 받은 적이 있다. 이전에는 독도 문제 등으로 일본을 비난하는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대미 비난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고 있었다. 2007년에는 청와대 앞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어, 보안 당국에게는 요주의 인물로 여겨지고 있었다. 리퍼트 대사를 습격했을 때에도, 현지 경찰서의 경찰이 김씨를 발견해 주최측에 배제(퇴장시키)하도록 충고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못했다고 한다.

 

김 용의자는 현장에서 붙잡힐 때, 막 시작된​​ 한미 합동 군사 훈련에 반대한다 등을 외쳤다. 군사 훈련을 "북한 침략을 위한 것"이라고 단정해 반발하는 북한의 주장과 통하는 점도 있어, 한국 정부와 여당은 사건 다음날에는 "(북한을 추종하는) 종북 세력이 일으킨 사건"이라고 단정. 수사 당국은 국가 보안법의 적용을 염두에두고 수사를 진행하고있다.

 

과거에, 한국에는 반미감정이란 것은 없었다

 

김 용의자가 "종북 세력" 인지의 여부는 향후의 수사 등을 지켜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다만, "반미 성향을 가진 민족주의자" 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반미"라는 것은, 사실, 그렇게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과거에 한국에는 반미감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주한 미군 병사에 의한 흉악 사건이나 교통 사고는 예나 지금이나 있지만, 한국에서는 그것이 큰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한국 전쟁(1950 ~ 53 년)에서 북한군에게 공격당해, 온 나라가 전쟁터가 된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던 시대의 한국에서는, 한국 방어를 위해 3만 7000명의 전사자를 낸 미국을 "생명의 은인" 으로 보는 의식이 강했다. 지금도 당시를 아는 노인과 보수파 사람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한국을 해방하고, 한국 전쟁에서 한국을 지켜주었다라는 "감사하는 마음"을 미국에게 품고 있다


한국의 고급관료를 위한 연수기관인 국방대학교의 2001년 우수 논문집에 "반미 감정이 국가안보에 미치는 영향" 이라는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한국 전쟁으로부터 10여 년 후인 1965년에 주한 미국 공보원이 서울에서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는 68%가 "가장 좋아하는 나라"로 미국을 꼽았다. "미국이 싫다"는 응답은 1% 뿐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 초까지 이어져 한국의 동아일보에 의한 1981년의 여론 조사에서도 미국에 대해 "좋다" 는 69%, "싫다"는 3.3%에 불과했다.


광주사건을 계기로, 미국에 대한 의구심이 대두

 

친미 일변도였던 한국 사회의 공기가 바뀌는 계기는 1980년의 광주 사건이었다.18년에 걸친 독재를 계속한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측근에 의해 사살되므로서, 한국 정치는 격동기를 맞이했다. 독재 체제가 끝났으므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서울의 봄"으로 불리는 자유로운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한편, 위기감을 느낀 신군부로 불리는 전두환 장군(후에 대통령)등의 그룹은 같은 해 12월에 "12 · 12군사반란" 을 일으켜 군의 실권을 장악한 후, 계엄령을 전국에 선포하고 민주화 요구 시위를 억제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 야당의 유력 지도자인 김대중 씨(후의 대통령)의 견고한 지반인 광주를 무대로 한 광주 사건이 발생했다. 광주는 1980년 5월, 신군부에 의해 김대중 씨 체포 등에 반발하는 대규모 시위가 연일 벌어져, 신군부는 특수부대를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희생된 시민의 수는 적어도 200명, 가족이 실종됐다고 신고한 사람도 300명을 넘었다.


한국군의 지휘권은 당시 주한 미군이 쥐고 있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과 지식인 사이에는 한국군에 의한 무력 진압을 미국이 승인했거나 적어도 묵인했다는 의혹이 생겨났다.


"친미"가 비틀어져 "반미"로

 

그리고, 같은 해 12월에 광주에서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나고, 82년 3월에는 부산 미국 문화원이 방화되었다. 85년 5월에는 서울의 미국 문화원에 대학생 73명이 난입하고, 농성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당시의 "반미"는 아직, 직선적인 반미 감정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당시 서울대에서 학생 운동을 이끌다 투옥된 경험이 있는 남성은, 이 일련의 사건은 "반미 운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신적으로는 친미라고도 할 수있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챔피언이어야 할 미국이 신군부와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사 독재 정권을 지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본래의 미국의 모습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하려고 한 것이라고 한다.

 

이 남성의 후배로 서울 문화원 습격사건에 관여했다고 해서 투옥된 김민석 씨 (전 국회의원)도 "미국을 신뢰하고 ​​있었는데, 미국을 우방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미국은 민주주의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미국을 특별시하는 "또 하나의 배경"

 

위의 논문 "반미감정이 국가안보에 미치는 영향" 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해방자이고, 한국 전쟁에서 한국을 구해준 미국은, 한국인에게 특별한 나라였다고한 후 "미국을 특별한 나라로 인식하게 된 또 다른 배경"을 언급하고 있다.

 

필자가 언급 한 배경은 "한국의 전통적인 대외 관계"다. 그 부분을 인용 해 보자.

 

과거에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는, 동생이 형을 섬기고 형은 동생을 돌봐주는 "형제"와 같은 사대관계가 주요한 외교형태​​였다. 한국인들은 이런 역할을 미국이 대신 맡게되기를 기대했고, 한국이 어려울 때 미국이 도와 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이)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는, 민주화로 나아가도록 미국이 압력을 가해줄 것을 기대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 사람들 사이에 생겨난 반미적인 견해는, 미국이 이와 같은 한국인들의 기대를 채워줄 수없는 데다가, 경제적인 압력을 가하는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감정이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있다.

 

논문 중에 나오는 "경제적 압력"은, 미국의 시장개방 압력과 주한미군의 주둔 경비로 "응분의 부담'을 요구받게 된 것을 가리킨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경제 성장을 이룬 한국에게는 부담을 요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단순한 것이지만, 논문은 "한국 측은 미국의 태도를 비판하고, 미국은 한국의 태도에 불​​만을 가졌다"고 지적한다.


사대주의는, 중국을 종주국으로 했던 조선시대까지의 전통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논문의 지적은 80년대에 "반미"로 여겨졌던 학생 운동에 투신한 사람들의 증언과 정확하게 겹쳐진다. 이러한 감정이, 미국에 대한 불만을 한국 사회에 전파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냉전종결을 거쳐 "반미" 변질로 변질인가

 

1980년 광주사건을 계기로 "반미" 라는 싹이 나타났다고는 하지만, 냉전 시대 하에 한국이 놓여진 국제 환경은 가혹했다. 당시 한국은, 냉전의 최전선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자유주의 ​​진영의 맹주인 미국에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경제적으로도 아직 개발 도상국의 우등생이라는 수준이고, 미일 양국과의 관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은 냉전 종결을 계기로 변한다. 한국은 90년에 구소련과 92년에 중국과의 수교를 단행했다. 한국에서는,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러일을 "4강" 이라고 부른다. 냉전이 끝나므로서, 한국은 겨우 4강 모두와 국교를 맺을 수 있게된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지금까지의 40여년에 걸친, 한국 외교로서는 "모든 것"이라고했던 미일 양국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경제도 드디어 선진국 수준으로 다가갔다. 한국은 96년 "선진국 클럽" 이라고도 하는 경제 협력 개발기구(OECD)에 가입에 성공한다. 1997년 말의 외환 위기를 경험하지만, 대담한 구조개혁을 받아드리므로서 경제의 V자 회복에 성공했다. 2002년에는 일본과 공동개최한 월드컵(W 杯)에서 한국 대표팀이 4강에 진출하는 기적적인 성적을 올린 사건 등도 있어, 한국은 점점 자신감을 굳혀갔다.

 

이러한 사회 상황의 변화를 배경으로, 한국에서는 1990년대 이후, 주한 미군 병사에 의한 흉악 범죄에 사회적 비난이 쏠리게 되었다. 2002년에는 주한 미군의 장갑차가 여중생 2명을 치어 사망케한 사고로, 운전했던 미군들이 군사 법정에서 무죄가 된 것을 계기로 반미감정이 폭발해, 서울 등의 각지에서 수십만 명이 촛불을 손에 들고 모이는 항의 집회가 열렸다. 같은 해 말의 대선과 그 시기가 겹친 면도 있어, "반미적" 으로 간주되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는데 강력한 순풍이 되었다.

 

노 씨는 선거 기간 동안, 반미 집회를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일은 피했었다. 그러나, 노 씨는 원래 "미국과 수평(대등)관계를 만들겠다"고 주장했다. 그 노 대통령을 당선시킨 시대의 분위기는, 1980년 대의 반미였던 "미국에 대한 동경"과는 이질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중국의 대두에 흔들리는, 한국의 미국관

 

한국인의 미국관은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다시 변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 계기는 중국의 대두다.

 

한국의 민간 싱크 탱크인 아산 정책 연구원이 2014년 3월에 실시한 여론 조사를 보자. 이 조사에서는 정치와 경제 각각에 대해 "지금 가장 영향력있는 나라" "앞으로 가장 영향력있는 나라"를 물어보았다.

 

"지금 가장 영향력있는 나라"는, 미국이 정치에서 81.8%, 경제에서 64.7%. 중국이 각각 5.2%와 25.2%였다. 이것이 "미래에 가장 영향력있는 나라"에 대한 질문에서는, 정치는 미국이 44.8%, 중국이 39.3%로 통계적으로는 오차 범위 내가 되고, 경제는 중국이 66.7%, 미국이 22%로 완전히 역전된다. 조사 보고서는 "많은 한국인이 지금도 미국에게 높은 지지와 신뢰를 보이고 있지만, 중국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따라 한국인의 마음이 중국 측으로 기울 여지도 없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고 평가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같은 해 4월에 방한했을 때, 한국의 중앙 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지리적 조건과 역사를 고려하면, 한국과 중국이 경제 협력을 늘려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나타냈다고 하면서 "그러나, 한국의 안보와 번영을 지킬 수있는 기반은 미국이다" 쐐기를 박은 후,"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라고 강조했다.

 

중국의 대두라는 영향을 받고, 미중 양국을 저울질하는 것 같은 논의가 나오기 시작한 한국에 대한 강한 경고였다. 중알일보의 워싱턴 총국장은 "오바마의 직접적인 경고"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중국으로 너무 접근하는 한국에 대한 불만이 미국에게 강해지고있는 점이 배경에 있다고 지적했다.


THAAD로  시험받는 한미동맹

 

올해 2월 4일, 서울의 한국 국방부에서 열린  중한 국방 장관 회담에서, 중국의 상만전 국방장관이 예정에 없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한 미군의 고고도 방어 (THAAD) 미사일 배치에 "우려"를 표명한 것이다.

 

THAAD는 주한 미군 기지에 배치가 검토되고있는 미사일 방어(MD)시스템이다.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지만, THAAD에 동반되는 X 밴드 레이더는 탐지 거리가 1000 킬로미터 이상이기 때문에 한국에 배치되면, 중국 내륙의 미사일 기지까지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는 것이 가능하게된다 . 따라서 중국은 실제로는 "중국 봉쇄"의 일환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한국의 한민구 국방 장관은 이때 "미국은 배치를 결정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요청도 없고 협의도 하고 있지 않다"며 해명에 압박을 받았다. 청와대도 그와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하지만 중국의 압박은 멈추지 않았다. 3월 16일에 한국 외무부에서 이경수 차관보와 협의한 중국의 유건초(劉建超)외교부 차관보는 회담 후, 한국인 기자들에게 THAAD문제를 논의했다고 피력하고 "중국의 관심과 우려를 중시해주면 고맙겠다"고 말했다. 중국의 고위 관리는 평상시라면 기자의 질문따위는 무시하는 만큼, 한국여론을 압박하려는 것은 분명했다.

 

한편 미국도, 주한 미군 사령부가 12일, "THAAD부대의 한국 배치에 대한 최종 결정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언급하면​​서도 "앞으로 있을 수있는 배치에 대비해서 적절한 위치를 찾기위한 비공식 조사를 실시했다"고 밝혔다.

 

17일에는 방한 한 러셀 국무부 차관보가 기자들에게 "아직 배치되지 않은 안보시스템에 대한 제 3국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라며 중국을 견제했다.

 

한국의 베테랑 정치 기자는 "안보 문제이기 때문에 의연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미적지근한 자국 정부의 자세에 불만을 보이면서 "중국은 이 문제로, 한국의 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례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경계심을 나타냈다.

 

하지만,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진보 성향의 야권에서는 "한국의 대외 기본 전략은 미 중간에 충돌을 초래하지 않도록 하는 것" 이라며, THAAD배치에 신중한 목소리가 강하다.


19일에 발표된 민간 조사 기관인 리얼미터의 여론 조사에서는, THAAD배치에 "찬성"이 42.1%, "반대"가  27.2%였다. 이 조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스스로를 "보수"라고 대답한 사람은 찬성이 62.9%, 반대 12.3%로 찬성이 압도적이었다 반면 "진보" 라고 대답한 사람은 찬성 24.2% 반대 51.6%로 반대가 압도적이었던 것이다.

 

한미 동맹 중시의 보수파와 중국 중시의 진보 성향의 의견 대립이라는 구도라고 할 수있다. 한국에서는 결국, 부상하는 중국과 어떻게 마주해 가는가 하는 것이 기존의 대미관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시대가 왔다고 할 수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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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달러와 금 관련 경제소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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